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으려면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예'라는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자본주의 외에 지금의 부와 혁신을 지속할 수 있는 체제가 있는가?
- 자본주의 외에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있는가?
슘페터는 이 책으로 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낭비와 비효율 없이 부와 혁신을 이끌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와도 양립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답이다.
단,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화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듯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인 내부결함에 의해 붕괴하면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큰 성공이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여러 보호장치를 파괴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자본주의 체제의 고도화는 기업가가 하는 업무를 관료들이 할 수 있는 단순 관리업무로 격하시키고,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집단의생활터전을 파괴하며, 포용적인 작동방식 때문에 자본주의의 적대적인 지식인이나 다른 세력의 억압하는 수단이 제한적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고 발전시킨 부르주아들은 합리주의적이고 평화적인 본성 때문에 종교나 이념같이 초-합리주의적인 신념과 감정적인 공감을 유발하지 못한다. 부르주아들은 지신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 방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준열하고 반박하기 힘든 주장이다. 슘페터의 자본주의 분석은 통찰력이 넘친다.
슘페터는 완전 성숙단계의 자본주의에서 마찰이 거의 없이 사회주의로 이행이 일어날 것이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경제적 번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슘페터의 주장이 비현실적이 되기 시작한다.
우선 수요/공급 때문에 조절되는 자본주의적 시장을 배제하고 재화와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교환하는 경제체제를 제시해야 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직접 책을 읽어보거나 아래에 첨부한 책 요약을 참조하기 바란다.
- 자원과 서비스를 고정된 가격에 무한히 공급할 수 있는 중앙청이 존재한다.
- 생산기관은 중앙청에서 자원과 서비스를 공급받아 이윤을 붙이지 않고 시장에 공급하면 시장의 수요가 얼마나 상품을 생산해야 하는지 즉각적으로 결정한다.
- 예상보다 수요가 많으면 생산기관은 중앙청에서 더 많은 자원과 서비스를 공급받는다. 예상보다 수요가 적으면 중앙청은 자원과 서비스를 다른 곳에 할당한다.
한마디로 공급가격을 중앙 경제계획/통제기관이 고정하고 수요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면 자본주의적 시장의 비효율을 제거하여 오히려 경제가 발전한다는 주장이다. 뇌내망상이다. 볼펜 하나만 해도 수십 종류인데 사람들이 원하는 상품의 종류와 양을 어떻게 중앙당이 다 통제를 하겠다는 말인가. 원자재와 서비스를 고정된 가격에 무한히 공급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한마디만 더 하자면 위 과정에서 직업선택 및 노동시간의 자유는 없는 것으로 가정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같은 방식은 아니나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던 소련이 경제적으로 어떤 파국을 맞았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소련 말기에 중앙기관은 다양하고 뛰어난 상품을 생산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곡식을 제 때에 도시로 운송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경제적 번영과 혁신에 인간의 '동기'가 필수적이라는 것은 슘페터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경제적 동기 이외에 인간의 동기를 자극할만한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가 볼 때, 이런 동기를 자극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사회적 평가와 명성'이다. 예를 들면 '성공적인 업적을 올린 사람에게 바지에 간단한 표지를 달 수 있는' 명예 같은 것 말이다. 두 번째 성과보수는 성취에 걸맞게 부여하는 '요트나 별장, 접대비' 같은 특권이다. 슘페터가 꿈꾸는 사회주의 세상에서는 탁월한 성과를 올린 사람은 바지에 간단한 표지를 달고 다니면서 요트나 별장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다. 예전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볼법한 광경이다. 어떤 게 성과인지 가치 판단은 누가 하고 특권은 누가 부여한다는 말인가? 당연히 중앙화된 기관에서 할 것이다.
슘페터가 꿈꾸는 사회주의 체제가 작동하냐 안 하냐를 떠나서 에서는 필연적으로 중앙기관에 엄청난 의사결정권이 집중될 것이다. 이는 슘페터 본인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체제가 비효율을 유발하지 않고, 권위주의적이고 비대한 권력기관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약점을 분석할 때 보였던 객관성과 통찰력은 어디 갔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다음 슘페터는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현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가 창조한 것이며 이 둘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정한다. 먼저 민주주의를 어떤 가치를 대변하고 추구하는 고전적 민주주의 해석을 배격하고 '유권자의 투표를 얻기 위해 지도자 후보들 사이에 자유경쟁이 존재하는 체제'로 좁게 해석한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좁게 해석해도 이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정치인과 이런 정치인을 배양하는 수준 높은 국민의 수준, 효율적이고 독립적인 관료제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후기 자본주의 체제를 인수한 사회주의는 이런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고 이런 상태에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치갈등 영역을 중앙기관이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소모적인 갈등마저 줄어든다는 게 슘페터의 주장이다. 단,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p423'
민주주의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은 일견 타당한 말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안된 수단이지 자체로 추구하는 게 합리화되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잔혹하거나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장기적이고 훌륭한 결정이 나오기도 한다. 단, 민주주의가 어떤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고안된 수단도 아닌 보통 기술적 정치 제도의 한 종류라는 주장은 기만적이다. 내 생각에 민주주의는 권력의 집중을 막고 권력 행사에 법적-제도적 절차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한다. 인간의 존엄성의 핵심은 자유이다. 개인적 자유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인가? 중앙기관이 정치영역 대부분을 관장하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이 사라지는 민주주의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슘페터를 포함해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부르주아적 자본주의가 주입한 관념으로 끊임없이 착각한다. 따라서 사회가 바뀌면 개인이 자유도 덜 추구하고 경제적 이익 없이도 동기부여가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슘페터는 이런 변화를 인간의 "제조건 화에 따른 변화"라고 표현한다. 사회주의 체제에 맞춰 사회 구성원의 욕구와 가치관, 행동방식을 변화가 필요하단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사회를 마음속에 아무리 그려보고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해 봤자 허망한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시도를 했던 사회가 어떤 처참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수도 없이 봐 왔다.
이윤(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개발한 이념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의 일부이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막으면 인간은 '바지에 붙이는 표식이나 남이 상으로 주는 별장, 요트'에 만족하지 않는다. 남에게 별장을 배정하고 표식을 붙여줄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한다.
자유(특히 경제적 자유와 자기 결정권) 또한 자본주의가 필요 때문에 주입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유치원생도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원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슘페터라는 인물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력이 번뜩인다. 단,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라는 그의 희망을 강조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취약함은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으로 단정하고 민주주의는 어떤 근본 가치(자유)와 상관없는 정치 운영 도구로 좁게 해석한다.
처칠은 민주주의를 가장 덜 나쁜 제도(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e others)라고 했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써 사회주의, 즉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과 의사결정에 바탕을 둔 시장을 배제하고 이를 인간의 계획으로 대체하려 한 제도는 반복적으로 실패했다. 안타깝고 장엄한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의 바닥을 치는 처참한 실패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에 새롭고 작동할 수 있으면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체제를 폄훼하거나 오해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책 행간 하나하나까지 공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책을 덮고 나서 한가지 확신이 강해졌다.
만약 자본주의가 어떤 모순 때문에 끝난다면 그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슘페터가 주장하듯 잘 작동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간 문명의 몰락일 것이다.
책 요약
1부 마르크스 이론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현세에서 천국을 약속한다. 부르주아 문명의 최고 정점이자 밑바닥이었던 시기에 실증주의적 정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지상낙원의 사회주의를 약속하는 메시지를 표방했고 이 메시지는 그 시대 많은 사람의 희망이자 인생의 의미를 주었다.
마르크스는 평생 철학을 사랑했고 헤겔의 영향을 깊게 받았지만, 그의 모든 연구와 저술에서 형이상학을 위해 실증적 과학을 배신한 적은 없다.
그는 이런 실증적인 태도로 '역사의 경제적 해석'을 시도했다. 생산양식과 생산조건이 사회구조를 결정하며 생산양식은 스스로 내재한 필연성에 의해 바뀐다는 것이다. 이는 손으로 돌리는 맷돌은 봉건사회를 만들고 증기로 돌리는 맷돌은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다는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 맷돌을 돌리는 힘이 손에서 증기로 바뀐 것은 생산양식과 조건의 필연성에 의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통찰력이 있지만, 현상을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반례로 중세 게르만족(프랑크족) 이동과 정복에 따른 중세 유럽의 봉건제 사회 형성은 군사-정치적 구조가 경제적 생산양식과 조건을 결정한 예이다. 역사에는 생산수단과 조건이 정치나 군사적 결정 등 다른 힘으로 결정된 수많은 예가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계급이론을 경제 분야에 적용했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두 계급이 존재하고 이 계급 간의 충돌인 계급투쟁이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 간의 투쟁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멸할 제도로 보았다. 이런 계급이론은 세상에 두 계급으로 극단적으로 나눠서 중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놓친다. 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협력적이란 점과 계층의 이동도 설명하지 못한다. 누가 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되는지도 뚜렷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계급은 단순히 경제적 현상으로 협소하게 해석했다.
마르크스는 노동 가치론을 이론적 분석의 주춧돌 삼았으며 이는 리카도의 영향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투입된 노동의 양에 비례하며 자본가는 여기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이 이론은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모순이 존재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점점 집중화될 것이며(집중화 이론) 노동자의 처우와 삶의 질은 점점 궁핍화될 것이고(궁핍화 이론) 경기는 필연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파멸로 치달을 것(경기순환론)으로 예측했다. 이 예상이 맞고 틀린 것과 상관없이 대기업의 등장과 경기순환의 근본적인 원리를 꿰뚫어 본 것은 뛰어난 통찰력의 결과라 하겠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 이론은 사회학과 경제학을 결합하여 '이론으로 규명된 역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는 '방법과 결과의 풍요로움이 보여주는 당황스러움' 즉, 세상사의 복잡성을 간과했다. 따라서 체계의 영향력과는 별도로 각론적으로 잘못되거나 모순된 점이 많으며 모호한 부분을 건너뛰거나 주장을 합리화하는 면이 있다. 마르크스 이론은 장엄하고 거대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듯한 신화를 통해 수많은 지식인과 추종자를 열광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세상을 단순화하고, 왜곡한 면이 많다.
마르크스 이론의 맹점을 수리하고 보다 정교화하기 위한 확장된 이론으로 마르크스 제국주의 이론이 있다. 제국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이윤의 감소 때문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계급투쟁. 식민지와의 갈등, 제국 간의 갈등으로 파국을 맞는다는 이론이다. 이 또한 역사의 변화를 이윤을 둘러싼 경제적 갈등으로 단순화한 면이 있다. 서구 제국주의의 탄생과 식민지 건설이 부르주아나 자본주의와 상관없이 진행된 수많은 예가 있다. 수많은 제국의 건설과 성공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계급 간의 협조 결과였다는 점도 간과하고 있다. 거대 자본가들 또한 제국의 운영과정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마르크스 제국주의 이론은 대중의 미신을 재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2부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다. 단, 자본주의의 종말이 마르크스가 말하듯 자본주의의 모순과 실패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큰 성공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성공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해 주는 제도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일으킬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부의 분배를 저소득층에 유리하게 만든다. 대량생산의 특성상 대중을 위한 제품을 저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에 의해 일반 대중의 생활 수준은 점진적으로 높아진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폐해를 주장하는 독-과점경쟁이론은 자본주의가 정태적인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기적임을 간과하고 있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새로운 상품과 시장, 생산수단이나 수송수단, 새로운 산업조직의 등장 때문에 상시로 생산적 파괴가 일어난다. 자본주의 발생 이후 일어난 엄청난 경제적 성과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은 명백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를 부정하는 많은 주장은 명백한 이론적, 실제적 한계에 부딪친다..
자본주의는 산업구조뿐 아니라 인간의 가치관에 자유로운 사고방식, 세속주의, 합리주의를 불어넣었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기술과 사회구조뿐 아니라 문화, 예술을 포함한 근대를 상징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발생하여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협 존재한다.
첫째. 기업가의 소멸 : 기업가는 새로운 발명이나 기회를 이용하여 생산수단을 혁신한다. 이는 대담한 도전의식과 재능이 필요한 것이지만 자본주의 발전 때문에 기업가가 하는 일이 일상적인 관리업무로 격하되거나 자동화와 같이 몰개성적인 방식으로 훌륭하게 충족된다면 기업가는 예전의 기사나 무사 계급처럼 소멸할 것이다. 이는 기업활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몰락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둘째. 지지 계층의 파괴 : 자본주의는 구체제의 특권과 사회구조를 파괴했던 방식(경쟁과 특권의 파괴)으로 소규모 제조업체와 상인의 경제적 터전을 공격한다. 대기업의 집중화는 자본주의의 핵심가치인 사유재산제도와 자유계약의 제도적 틀을 약화했다. 더는 사유재산은 자신의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강력한 장악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무한정한 선택 가능성과 선택의 책임이라는 자유계약은 약화하고 새롭고 다양한 법적 제약을 받고 있다.
셋째. 점점 커지는 적개심 :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비교적 덜 억압한다. 이런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은 부르주아 계급은 왕과 교황, 귀족의 자격에 대한 시비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 부르주아의 핵심적인 가치와 사유재산까지 전반적인 공격을 가한다. 자본주의는 절대적 권위나 권력을 추구하기보다 합리적인 수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적 공격자의 비합리성에 대처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이익은 장기적인 통찰력과 분석력을 갖고 있을 때만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자본주의 적대자에게 이런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어렵다. 사람은 살면서 느끼는 불만과 좌절을 외부의 요인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적대적 충동을 다스리려면 사회구조와 질서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 필요하나 자본주의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지 못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생활개선은 반대로 개인적인 욕구불만과 불안함을 고조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제도에 대한 원망이 커질 수밖에 없다.
넷째. 여기에 이런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지식인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지식인은 고학력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문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글의 위력을 휘두르며 실제적인 업무의 일차적 지식이 결핍되어 있고, 방관자, 혹은 구경꾼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 왕과 왕실, 이후에는 부르주아들에게 복무하였던 집단이다. 이런 집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기회가 확대되면서 고학력자가 늘어나고 이들이 생산해낸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점점 수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이들은 노동운동의 성격을 바꾸고 한 시대의 도덕적 코드를 통제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고 있다.
다섯째. 자본주의의 합리적 정신은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비(非) 영웅주의적이고 비(非)낭만적인 존재들로 부르주아적 결혼관과 인생관마저 경제적 이해관계로 바라본다. 이들은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와 투쟁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노동과 부에 관해 자본주의의 질서와 가치 기준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인다..
가장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고 수호했던 부르주아들이 더는 자신들의 이상이나 이해관계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경우가 없다. 이런 비겁함에 대한 타당한 설명은 이들이 자신들의 질서가 어떻게 되던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사회주의는 작동할 수 있는가?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과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권이 중앙 당국에 부여되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가정했을 때, 사회주의는 잘 작동할 수 있다. 이런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어떤 형태를 가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다. (문화적 불확정성)
이런 체제하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독립적이고 모순 없이 운영될 수 있다.
예를 들어(비유로 말하자면) 쌀과자를 만드는 지청은 쌀과 기타 재료를 분배하는 중앙청의 감독과 통제를 받는다. 쌀과자를 만드는 지청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에 따라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쌀과 서비스를 사용해 쌀과자를 생산한다. 1.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만들 것 2. 중앙청은 지청에 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무한정의 쌀과 서비스를 제공할 것. 3. 지청은 쌀과자를 한계비용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할 것. 이 경우 중앙청에 의해 가격이 확립된 후 소비자들이 수요를 알려주는 순간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여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즉 시장에서 수요에 의해 공급과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가격에 대한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쌀과자를 생산하는 지청에 더 효율적인 기계장비가 들어와서 쌀과자의 생산비용이 감소하였다면 지청은 남는 이윤을 축적하는 것도 아니고 중앙청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라 생산에 들어가는 다른 요소(예를 들면 노동력)를 다른 산업에 투입하여 생산수단의 효율화를 꾀할 수 있다.
만약 인프라 건설이나 생산요소를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일부 자본주의적인 요소인 잔업에 의한 성과보수의 저축과 금융기술을 용인할 수 있고 중앙기관에서 국방비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특정 사회적 예산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잔업과 직업에 대한 개인적인 선택의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지대(地代) 또한 토지의 생산적 사용 가능성 지표로 부여받아 합리적으로 배분된다. 이런 경제체제에서 임금은 노동시간을 환산한 소비재 청구권의 의미가 있다. 이 체제에서 관계 당국이 시장을 대신하여 모든 소비재의 중요성과 지표를 평가하고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독점 자본주의)와 비교하면 경제적으로 우월하다. 그 이유에 대한 가장 확실한 이유는 경제활동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관리체제에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생산요소나 수단을 쓸 수 있다. 이런 관리 덕분에 불경기가 제거되어 실업이 훨씬 줄어든다. 사회주의 경제에서 단순히 실업만 줄어들 뿐만 아니라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인적자원을 배치할 수 있으므로 그 효율성이 줄어들며 각 경제주체 간의 적대적인 갈등을 줄여 이에 소모되는 자원과 인력의 낭비를 막는다. 또한, 모든 세입의 원천을 중앙청이 관리하기 때문에 세금도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 능력 밖의 지적능력과 도덕성이 필요하다는 반론이 많지만, 이는 합리적인 주장이 아니다.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기 위해 인간성의 근본적인 개조는 불필요하다. 일련의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일으켜 사회 구성원들을 '재조건화에 의한 변화'를 일으키는 정도로 충분하다.
농민과 사무원 수준의 세계에서 사회 시스템이 개인 간의 계약 때문에 운영되나 중앙화된 기관에 의해 운영되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단, 고급 인적자원은 어떤 사회에서나 필수적이고 필요한바, 고급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부르주아의 경제체제의 장점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합당한 지위와 자율성을 부여하여야 한다. 이런 사회주의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관료제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관료제는 사회주의 체제를 운영할 유일한 방법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장애물도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의 성과보수는 일차적으로 이윤과 같은 금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평가와 명성' 같은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공적인 업적을 올린 사람에게 바지에 간단한 표지를 달 수 있는 특권을 주는 것이다. 그 외에 공식 관저나 요트, 의전비용 같은 특례조항이나 특혜를 통해 성과를 올린 사람을 우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저축과 규율에 관한 권한은 반드시 부르주아에게서 박탈해야 한다. 저축, 즉 부의 저장은 국가나 중앙차원에서 공장이나 설비생산에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규율 적인 영향력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사라져야 한다. 사회주의하에서는 규율 유지를 위해서 쓸 수 있는 권한이 훨씬 강력하고 다양하다. 이런 규율하에서 파업은 반란으로 간주하고 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요구하는 단체가 아니라 장기적인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중앙정부와 협력하는 존재가 된다. 이를 소련 혁명 과정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회주의화는 완전히 성숙한 독점 자본주의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성숙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화 겪는다면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4.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마르크스 사회주의에서는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이 중단되면 진정한 국민에 의한 통치가 가능해지므로 마르크스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 주장한다. 이는 마르크스 도식에 들어 있는 용어들의 정의(定義)에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에 불과하며 어떤 면에서는 선동적 수사에 불과하다. 이론이 아닌 실제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은 일관되게 민주주의적 정신과 방법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민주주의적 방식이 항상 이성적이고 인도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비민주주의적 방식이라고 항상 독단적이고 착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적 방법으로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적 배치의 특정 유형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우선 민주주의를 정확하게 정의(定義)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통치를 의미함으로 '국민'과 '통치'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국민이 누구이고 어디까지를 국민으로 보는지는 각 사회의 특수성에 의해 결정될 수 있고 기술적으로 국민이 국민을 통치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는 곳은 소규모 공동체에 한정된다. 따라서 국민이 국민을 통치한다는 개념은 국민에 의해 승인된 정부에 의한 통치 정도로 합리화해야 한다.
이런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의 의지, 혹은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이 구체제와 함께 사라진 왕권신수설 권위를 대체하기 위한 심리적 대체물로 등장했다. 정확히 이런 개념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루소의 사회 계약 이론을 연결 지은 것으로 이는 사회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어떤 합의된 의지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를 고전 민주주의 이론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의하거나 합리적인 논의 때문에 동의할 수 있는 공동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공동선을 추구하는 국민의 의지라는 것도 공허한 개념이다. 만약 대다수 국민에 이로운 어떤 질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민주주의적 절차는 오히려 끝없는 교착상태와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비민주적인 방법은 효과적이고 전체 사회에 이득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 제 1집정관으로 있을 때 내린 종교 안정책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군중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충동에 자주 휘말리며 이는 일시적인 일탈이라기보다 인간 본성에 내재하여 있는 특성이다. 그리고 인간은 직접적인 책임의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많고 정확한 정보가 많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정치적 결정에 무책임하기 쉽다. 이런 점을 정치인들은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시민들에게 제한되고 왜곡된 정보와 논의들을 생산해낸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행위는 심리적 기술 정도로 격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민주주의를 고전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유권자의 투표를 얻기 위해 지도자 후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유경쟁이 존재하는 체제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런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이 필요하다.
- 정치하는 사람들이 높은 도덕적 기준과 능력을 지녀야 한다.
- 정치적 결정이 사회 전반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한정된 범위가 있어야 한다.
- 정치, 여론에 독립적인 효율적인 관료제가 존재해야 한다.
- 유권자와 의회 모두 높은 지적, 도덕적 능력을 유지하여 협잡꾼의 달콤한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다.
- 견해차에 폭넓은 관용이 존재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국민을 비롯한 정치인이 높은 도덕성과 지적능력이 있으면서 강력한 관료제가 존재해야 한다. 이런 체제는 자본주의와 함께 일어난 부르주아체제의 산물이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에서는 경제를 운용하는 기관들이 정치가들의 간섭을 훨씬 덜 받으며 정치영역에서 다뤄야 했던 수많은 경제주체 간의 갈등이 불필요하다. 그 때문에 정치적 관리의 영역은 민주적 방법의 제약이 설정한 테두리 내에서 그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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