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법, 입법 그리고 자유 - 1편 규칙과 질서; 프리드리히 A 하이예크

 


신종코로나가 처음 맹위를 떨쳤을 때,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마스크의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시간을 되돌려 본다면 마스크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을까? 여기서 효과적이라는 말은 정치적 불만과 상관없이 최대한 빨리 공급을 늘리는 방법을 말한다. 당시 한국이 취한 방법은 마스크의 생산과 분배를 정부가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원재료 및 마스크의 신속한 통관을 보장하고 매점 행위를 막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입상은 기회를 찾아 밀수라도 해 왔을 것이고 국내 제조업체도 다른 곳에 쓰여야 할 자원을 돌려 마스크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스크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다른 대체품이라도 개발했을 것이다.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대한 거부감은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특수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과의 형평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급을 최대한 빨리 균형으로 돌리는 것이 마스크를 빵빵하게 살 수 있는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이해도 보장하는 길이다.

 

형평이나 정의 같은 따듯한 원칙이나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의 계획을 발동하는 것보다 인간 사회의 자연적인 작동원리를 존중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비합리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정의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근대 이후 인류가 정답 대신 반복적으로 그럴듯한 오답을 찍는 이유이다. 이 책은 이런 현상에 대한 고찰이다.

 

 

 

, 입법 그리고 자유는 총 세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첫 번째 책이 규칙과 질서이다. 여기서 말하는 규칙과 질서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용의주도하게 설계한 것이거나 발명한 것이 아니다. 하이에크가 정의로운 질서라고 반복적으로 정의하는 이 질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유형의 행동을 기초로 환경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이는 계획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다. 원시 인간 사회부터 인간 사이, 혹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성이 아니라 선택 때문에 살아남고 번성하게 된 그 규칙을 말한다.

 

이런 본연의 규칙은 일반적이지만 언어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이다. 이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에서 특별한 상황에서의 적절한 행동을 규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렇다.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반가움과 인지, 선의를 표현하는 예절이 있다. 바로 인사이다. 인사법을 말로 일일이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특정 상황에서 어떤 게 적절한 인사인지 구분하고 행동할 수 있다. 심지어 문화권이 다른 사람끼리 만난다 해도 각자의 인사에서 같은 의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사예절을 무시한다면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적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인간 사회의 정의로운 규칙이란 이렇듯 계획을 통해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런 규칙을 준수하다 보니 인간이 살아남게 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이성적, 연역적 추리의 결과라기보다는 수많은 결과에서 공통점이나 대응책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대다수이다. 버드나무 잎을 끓여 먹는 게 해열효과가 있다는 것은 아스피린이라는 약의 화학구조의 생리기전이 알려지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잠재적 약물은 그 화학구조나 생리기전을 규명을 통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우연히, 혹은 반복적 실험을 통해 발견된다.

 

위 이야기는 인간의 이성이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세상일을 인과관계에 따라 체계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상적인 인간이 존중하기 때문에 사회를 형성하게 만드는 정의로운 질서이지 의회가 남발하는 제정법이 아니다.

 

규칙 또한 그렇다. 인간 사회를 원활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규칙과 질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진화를 통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이를 발견하고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그리스, 로마법의 성문법화는 이런 노력이다. 법은 발견되고 표현될 수 있을 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 규범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해 주어 그 한도 안에서 자유를 주는 것이 법이다. 인간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법을 제정할 수 있다거나, 특수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특별하고 구체적인 명령을 개인에게 부과한다는 생각은 절대 황정기에 나타난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왕권의 절대성을 상징하던 입법권을 의회의(혹은 정부의) 절대성으로 바뀌었을 뿐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정의라는 일반화할 수 없는 개념을 추구하겠다는 목적으로 특별한 명령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남발되고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로운 질서와 규칙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제정법이 진정한 법을 대체할 때마다 인간이 복잡한 사회를 이루며 번성하게 하는 진정한 법은 위축된다.

 

하이에크가 말하려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엄밀한 논리적 추론에 의해 카오스와 같이 엄청난 인과관계가 얽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심지어 사회도 이성에 기초해 전통과 관습, 역사를 뛰어넘어 사회를 이성적으로 재구축할 수 있다는망상에 빠지기 쉽다. 이런 시도가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했는지 역사는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시도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적 망상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정의를 내세우며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법과 새로운 제도를 남발하는 많은 국가들도 결국 망하는 속도만 다를 뿐 소련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망상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우선 인간의 교만함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후 모든 지성계의 흐름은 이성으로 자연 뿐 아니라 사회를 합리적이고 재배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런 말이 듣기 좋기 때문이다. 사회를 특별한 수단을 통해 바꾸겠다는 주장은 항상 정의와 같은 아름다운 말이나, 안전과 같이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말을 동반한다.

 

결론은 이렇다. 현재의 법은 인간의 자유의 범위를 규정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을 점점 벗어나고 있다. 정부의 목적에 따라 특정인에게 특정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명령이 법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근대 이후 구성주의적 합리주의라는 인간의 망상을 이어받은 여러 전체주의적 이념이 법의 개념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이를 진정한 법으로 되돌리지 못한다면 인류는 천천히 전체주의적이고 퇴보적 사회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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