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개전 5일까지 상당히 선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러시아가 두 가지 상충하는 군사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우크라이나 중요지역을 장악하는 것과 민간인과 시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대량 인명피해가 일어나면 새로운 우크라이나 괴뢰정부에 대한 시민의 협조가 힘들어질 것이고, 전쟁이 길어지면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직까진 공습도 외과적 정밀타격수단을 썼고, 총 동원 병력의 상당수를 아직 예비대로 두고 있다.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빠르게 점령하면서도 부수적 피해는 최소화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는 건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미미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 것이다. 아마 빠르게 수도와 주요 도시를 포위하거나 점령할 수 있고, 우크라이나 현 정권은 도피하거나 몰락할 것이라고 예상한듯 하다. 그다음 새로운 정권과 유리하게 정전 협상 맺으려 했을 것이다.
미국은 개전 2일째 키예프의 함락이 임박했다고 봤다. 중국 또한 주요 도시의 점령을 예상하고 중국인들에게 오성홍기를 달고 다니라고 주문했다. 나도 대략 개전 5일이면 주요 도시가 함락되고 10일 이전에 전쟁이 마무리되리라 보았다. 그다음 지역에 산발적인 게릴라전, 서방과 러시아의 소모적인 경제보복이 계속되리라 예상했다. 모두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북부 우크라이나 사용자들의 항전 의지를 얕잡아본 것이다.
결국 전황이 정체되면 푸틴은 민간인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인구 밀집 지역에 본격적으로 화력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과 비교가 안 되는 대량 인명 피해가 불 보듯 뻔하다. 우크라이나의 분전에 감명받으면서도 우크라이나가 잘 버틸수록 민간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높다는 점은 염려되는 상황이다. 이미 벨라루스가 참전했다.
지금 상황은 정말 상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서유럽으로의 확전과 핵무기의 사용이다. 푸틴은 이미 선전포고 역할을 한 담화에서 러시아의 침공을 방해하면 "당신들 역사를 통틀어 본 적 없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뒤의 러시아의 강력한 핵능력을 과시한 내용을 볼 때, 문맥상 핵 무기의 사용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푸틴이 미치지 않고 어떻게 핵무기를 사용하냐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틴이 실제로 침공한다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확신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가 침공이 임박했다고 수차례 경고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인간의 확증편향은 무서운 것이다. 대충 머릿속 회로는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무슨 이야기인지 다 알겠어...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는 없어...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잖아.." 하지만 조건이 맞으면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푸틴은 전술적인 거짓말은 밥 먹듯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고, 그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전략적 목적을 위해 푸틴이 사용하는 수단은 상당히 예측 가능하다.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미국과 서구 지도자를, 어쩌면 서구 사회를 진심으로 혐오한다. 우크라이나인에는 연민과 동정심을 가질지 몰라도(범 러시아계로 여기고 있으니) 서구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는 전혀 연민을 보이지 않을 사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zlkEuPWg3s&t=1s
미국과 서구가 SWIFT를 이용한 제재를 포함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할 것이고, 망명정부 지원을 포함한 회색 전쟁도 지원 하리라는 건 러시아가 예상했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과 서구가 회색 전쟁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군사 개입을 공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험한 일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참전 전까지 연합군 측을 대놓고 지원했어도 이를 공표하지는 않았다. 한국 전쟁과 월남전에 소련도 대놓고 공산 측을 지원하고 심지어 몰래 참전도 했지만 이를 대놓고 발표하지는 않았다. 미국도 아프간에서 소련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을 조직하고 지원했지만 이를 대놓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한 나라가 교전 당사자 한 편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선언하는 것은 대리전 조장도 아니고 회색 전쟁도 아니다. 선전포고에 가깝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현재 서구가 구심점 없이 각자 행동하고 있고, 그 지도자들(특히 유럽)의 현실 인식능력과 판단력이 냉전 시대에 비해 심각하게 퇴락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의 지휘 아래 비교적 조율된 의사결정을 했던 것에 비춰보면 지금 서구는 누가 무슨 결정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여러 나라가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EU는 사상 최초로 무기를 공급하는데 드는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몇몇 나라는 자국 시민의 의용군 참가를 독려하고 있다. 심지어 EU에 우크라이나를 가입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숙하고 위험한 행동이다.
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을 때야 뭘 지원해도 할 말이 있지만, 교전 중인 나라 한쪽에 국가 차원의 무기 제공은 사실상 군사적 적대행위이다. 그래서 직접 교전 당사자가 아닌 나라가 교전 중인 나라의 한편을 지원할 때, 최소한 비밀리에 하는 시늉이라도 한다. 구체적인 무기의 종류와 갯수까지 공개하며 교전 당사자 일방에 제공하는 것은 근대 역사에 보기 드문 일이다. 잘 살펴보면 개전 이후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자금을 지원한다는 이야기는 하지만 대놓고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말하지는 않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에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기 때문이다.
미국과 서방에 있어 최선은 러시아를 수렁에 빠뜨려 경제를 파괴하고, 푸틴을 실각 시켜 러시아 중심의 동맹을 와해하고, 최종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러시아가 미국과 서방을 직접 공격할 빌미는 주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가 스스로 무너지게 출혈을 강요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군사적 자극은 자제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 유럽 지도자는 이런 균형감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위험한 선을 밟고 있다. 직접 파병할 용기는 없으면서 그냥 조용히 줘도 되는 소화기와 푼돈을 동네방네 떠들면서 주고 있다. 자국의 유권자에게 어필하려는 이유이다. 러시아가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니까 하는 행동이다. 헤비급 복서 앞에서 도발하는 단소살인마를 보는 느낌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서방의 대(對)러시아 대응 전략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부의 한계 때문에 냉정하고 전략적인 대러 정책이 아니라 유권자에 휘둘려 감정적이고 불필요한 대응을 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대량 인명 피해가 나오기 시작하면 이런 현상이 더 악화될 거라는 점이다.
이전 글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면 전 세계적 핵확산이 있을 것이고, 결국 국지전이나 테러에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멀리 갈 필요 없이 잘못하면 이번 전쟁에서 서유럽에 핵무기가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극적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되거나, 푸틴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푸틴이 실각하거나, 미국과 서구가 조율되고 절제된 대(對)러시아 전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번 전쟁은 길고, 추하고, 상상하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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