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미국 외교의 대전략(The hell of good intentions); 미국 외교를 파국으로 이끈 '자유주의 패권'에 대한 대안



미국의 국제전략은 이상하다. 너무 많은 곳에 개입하고, 목적이 불분명하고, 인권과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지만, 그 잣대가 상당히 자의적이라 위선적으로 보인다. 미국이 무언가 할수록 미국의 국익을 해칠 뿐 아니라 개입한 지역 전체에 재앙을 불러오기 일쑤이다. 왜 그런가? 이 책은 그 원인에 대한 성찰과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미국과 영국의 패권전략을 비교해 보자. 영국은 최전성기에 두 가지 외교 대()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유럽 대륙에 강력한 패권 국가나 역외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다. 둘째. 국외 식민지(특히 인도)를 유지하고 이를 위해 해상 우위를 유지한다. 이 원칙은 영국의 의지에 맞게 세상을 적극적으로 개조하겠다거나, 영국적 가치를 전 세계에 퍼트리겠다는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역외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소극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이다. 어떤 면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와 비슷한 면이 있다.

 

영국은 이 원칙에 따라 별일이 없을 때는 조용히 힘(특히 해군력)의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며 국내와 식민지 경영에 몰두했다. 만약 핵심이익이 걸린 곳에 힘의 균형이 붕괴하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 원칙에 따라 루이 14, 나폴레옹이 유럽 패권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했고 러시아가 팽창하는 것을 크림반도와 조선의 거문도까지 달려가 막았다. 독일의 부상을 막기 위해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치렀다. 영국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영국의 패권은 수 세기를 지속했고, 자기 힘을 넘어서는 펀치를 경쟁자에게 날릴 수 있었다. 국력이 쇠하여 제국을 유지하지 못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화적, 인종적으로 아들뻘 되는 미국에 평화롭게 패권을 이양하고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옆에 붙어서 아직도 국력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패권을 상실한 나라 중 가장 우아하고 현명한 퇴장이다. 이런 전략을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이라고 한다.

 

미국도 냉전 종식 이전까지는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였다. 강력한 소련과 그 위성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일본, 한국에 주둔했지만, 이는 소련을 주변 동맹국이 억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외 지역에서는 지역 세력 간의 힘의 균형에 의존했다. 물론 베트남전 같은 예외적인 실수도 있었다. 냉전 종식 후 영국이 가다듬고 냉전을 승리로 이끈 이 전략을 더 가다듬어 사용할 수 있었다. NATO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 사이의 평화와 힘의 균형을 조율하고, 불필요한 지역 갈등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고, 군비를 힘의 우위를 유지하는 선에서 최소화하여 그 자원을 국내문제에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은 소극적 역외균형전략을 벗어나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전략을 추구한다. 미국은 보편적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해야 할 숙명적 역할에 따라 전 세계를 적극적이고 선제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런 원칙은 미국을 더 부유하게 하지도 못했고 안전하게 하지도 못했다. 냉전 후 미국이 개입한 곳에서 민주적 가치가 전파되기는커녕 역내 불안을 일으키는 실패 국가만 나타났다. NATO의 확장은 러시아의 반발과 물리적 반격만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막대한 물적 피해와 비용을 치렀고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이 책의 문제 제기는 이런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암울한 실패를 불러온 '자유주의 패권'정책이 왜 바뀌지 않는가이다. 저자의 진단은 간단하다. '자유주의 패권'이라는 전략을 이끄는 정치, 외교, 언론, 학계의 초당적 인사들이 무책임한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복적인 실패에도 같은 변주를 계속한다. 행정부 각료부터 학계까지 활동 영역을 넘나들며 서로를 보상하고 지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유주의 패권'은 일종의 일자리 보장책이다. 이런 상황에서 냉정한 현실 인식에 따른 미국 외교전략의 변화는 요원하다.

 

저자의 해법도 간단하다. 미국은 역외 균형자 전략으로 되돌아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을 지켜야 한다.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란 유럽과 아시아에 강력하고 호전적인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막는 것, 핵확산을 저지하는 것, 미국을 겨냥한 테러를 막는 것이다.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은 유럽, 중동, 아시아이다. 세상을 미국의 이익과 가치에 맞게 변형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에서만 집중해야 한다. 이 또한 역내 동맹국에 의존해야 하고 역내 힘의 균형이 붕괴할 때만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NATO의 확장은 역외균형에 반하는 행동이므로 수정해야 한다. 유럽의 안보를 유럽인에게 맞기고 러시아와 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불필요하게 러시아의 핵심이익을 침범해선 안 된다중동에서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보통국가로 대해서 팔레스타인과의 2국가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이란과는 화해해야 하고 기존 석유 왕국과의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 이란이 잠재적으로 힘의 균형을 깨뜨릴 때만 재균형을 위해 개입해야 하고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역외 국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 저지하면 된다아시아는 앞으로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이다. 중국과 힘의 균형을 맞추기에 주변 국가는 너무 취약하고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은 여기에서 동맹국을 규합하고, 군사력을 집중해야 한다.

 

이 책은 2018년에 발간되었다. 그가 말한 해법에 따르면 벌써 유럽과 중동에서 미국의 외교전략은 결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미국은 앞으로 한참 동안 유럽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주둔해야 할 것이고 미국이 방어 불가능한 핵무기 투발 능력을 갖춘 러시아와 확전 위험에 시달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다. NATO의 확장과 러시아와의 충돌에 관한 내용은 거의 예언에 가깝다. 본문 내용을 잠시 인용해 보자. 

러시아와의 관계는 대체로 미국이 계속해서 러시아의 경고를 무시했고 러시아의 사활적 이익을 위협했기 때문에 악화하였다. 가장 결정적인 조치는 NATO를 동쪽으로 확대하겠다는 결정이다.... 고(故) 조지 케넌 같은 러시아 전문가가 말했듯 이런 조치는 ‘비극적 실수(tragic mistake)’라고 경고했다. p62~63 

조지 케넌은 냉전 당시 냉전의 본질과 소련의 한계를 꿰뚫어 본, 냉전기 미국 전략의 지침이 된 'The Telegram'을 작성한 사람이다. 예언처럼 미국의 NATO 확장정책은 비극으로 끝났다.

 

중동에서 이란과 화해는커녕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석유 왕국과의 관계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미국이 이란 최대의 적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파괴한 덕분에 힘의 균형은 이란에 훨씬 유리해졌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과 투발 능력은 더욱 고도화되었다. 이스라엘을 포함해 중동 국가들은 더욱 독자적 외교정책을 쓰고 있고 중국과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스라엘의 강경책과 이란의 확장, 예멘 내전 등 역내 불안은 언제든지 파괴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상황이다. 중동에 쏟은 모든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동에서 파국을 맞고 있다.

 

미국은 국제전략 3연전에서 이미 2연패 한 상황이다. 마지막 결정적인 전장이 아시아에 남아있다. 중국을 견제해야 할 가장 결정적이고 사활이 걸린 전장이다. 하지만 미국은 상당 기간 유럽에 재주둔하고 막대한 자원을 여기에 투입해야 할 것이다. 이미 말했듯, 이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은 취약해졌고 중국은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약해진 몸과 분산된 집중력을 갖고 이미 견제하기 벅찬 지역 패권국이 된 중국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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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니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이 책이 발간된 2018년보다 현실은 더 악화하였다. 안타깝게도 미국은 역외균형정책을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외균형 정책에 따르면 유럽과 중동에서 불필요한 개입을 피해 얻은 미국의 자원을 모조리 동북아시아에 쏟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렀다. 한동안 미국은 유럽에 잡혀있어야 한다. 중동에서도 역외로 물러나기는커녕 중동의 역내 불안이 언제든 미국으로 옮겨붙을 수 있는 상황이다. 동북아에 쓸 자원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 동북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은 이미 심각하게 무너졌다. 조그만 틈만 보여도 중국은 아시아와 서태평양에서 미국을 몰아내려고 시도할 게 뻔하다.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외교적 수단인 역외균형은커녕 힘과 힘으로 맞부딪칠 수 있는 위험한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이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기는 힘들 듯하다. 현실과 가치를 고려해도 한국은 이미 이질적인 서구국가가 되어버렸다. 인종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서구와 다르지만,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가치까지 서구적인 국가이다. 서구식 사회모델과 중국식 사회모델 중 후자를 택할 사람은 거의 없다.

 

앞으로 상당 기간 미국이 역외균형 같은 이성적인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 말인즉 동북아에 긴장은 높아지고 편을 분명히 하라는 미국의 압박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미국이 지정학적 대결에서 쓰는 말 중 좋은 꼴을 본 경우는 내가 알기로 없다. 대표적인 예가 우크라이나이다. 동북아에서 미국이 쓰려는 말은 대만, 일본, 그리고 한국이다. 인도는 지금 보듯 미국이 부리기에는 너무 크고, 호주는 엄밀히 말하면 동북아의 역외 국가다. 상황이 불리하면 언제든 도망가거나 물러갈 수 있는 존재다. 대만은 생존을 위해 중국과 대결해야 할 숙명을 갖고 태어난 나라다. 일본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중국을 견제해야 할 사활적 이익이 있는 규모의 나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이 일본을 이용하는 만큼 일본도 미국을 이용하는 관계이다.

 

한국은 어떤가? 우리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해야 할 사활적 이익이 있는가? 아니다. 우리의 사활적 이익은 한반도 부근의 평화와 북한의 보통국가화뿐이다. 우리나라가 동북아의 패권을 추구하겠는가? 동북아를 한국의 가치와 이익에 맞게 개조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한반도에서 위협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면 된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동북아전략과 한국의 사활적 이익은 항상 일치하는 게 아니다. 이런 면에서 미-중 사이에서 급격한 위치 이동은 스스로 장기판의 말을 자처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쪽으로 움직이더라도 천천히, 그리고 중국 쪽에도 충분한 설명(이해하던 안 하던)을 동반하여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의 대결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듯 움직여야 한다고 본다. 이게 내가 이 책을 읽고 고민했던 한국의 최선의 길이다.



댓글

  1. 너무나 너무나 어려운 스텝이군요. 대륙과 섬 사이에 끼어있는 반도국가의 지정학적 숙명일까요.
    대다수 국민들의 극심한 반중정서가 장기말을 더 자처하게 되는건 아닌지... 그리고 이와 맞물려 달러와 위안은 어떻게될지 몇년 전 글부터 말씀해오셨던것들이 서서히 피부로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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