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Nation’을 번역하자면 국가, 국민, 민족이다. 한국인의 통념상 이런 해석에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국가는 당연하고 국민과 민족 또한 한국에서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국민을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민족은 한국인이라는 더 넓은 ‘문화-언어-전통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북한사람은 우리와 다른 국민일지라도 하나의 민족으로 볼 수 있다. 정치적 수사에서도 국민을 내세우는 사람과 민족을 내세우는 사람은 상당히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에서 네이션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은 어떤 의미인가? 민족, 국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추상적이고 현실과 무관한 듯 보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아직 정체성의 형성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 책은 이런 질문에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선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를 정의해 보자. 어떤 집단이 자신의 공통된 언어, 종교, 관습에 기반해 다른 집단과의 구별의식이 싹터 있다면 이는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집단이 국가나 국가에 준하는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고자 의식까지 성장한다면 이를 민족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반해 국민은 근대사회에서 국가의 정치적 기초를 담당하는 구성원이다. 근대국가 형성의 기초로 에스닉 그룹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고, 보편적 가치를 더 내세우는 예도 있다.
어떤 경우든 근대국가가 성립하면 높은 통치의 밀도를 바탕으로 균질한 ‘국민’을 만들어낸다. 이른바 국민국가(nation state)의 형성이다. 에스닉 그룹의 특성을 바탕으로 국민을 형성한다면 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소수파를 동화하는 ‘민족의 국민화’를 시도한다.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여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균질한 특성을 갖게 된다면 그 국민은 문화적으로 균질화된 특질을 갖게 된다. 이를 ‘국민의 민족화’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프랑스를 ‘국민의 민족화’ 경향의 국가로 볼 수 있다면 한국, 중국, 일본은 ‘민족의 국민화’ 경향의 나라로 볼 수 있겠다. 이렇듯 나라마다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방법도 다르고 국민(nation)을 정의하는 방법도 다르다. 우리는 에스닉 그룹(한민족)을 바탕으로 국가를 성립한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국민국가를 민족국가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적 특징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국민국가임이 분명한 미국을 민족국가로 변화 범위 해 보자. 미국민족(?)이라는 이상한 어감이 나타난다.
국민뿐 아니라 에스닉한 기초에 따른 민족 또한 근대적 창조물이라는데 반론이 별로 없다. 이런 말은 한국인에 매우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 “한국민족이 창조된 것이라니. 같은 문화, 유구한 역사와 혈연으로 엮여 실존하는 것이 한민족인데.” 하지만 위에 창조물이라는 뜻은 민족의 원형으로 전근대에 어떤 공동체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의 민족으로 의식되고 확정되는 과정은 근대국가가 국민을 만드는 과정에 따른 것이거나 역외 근대국가의 출현에 자극받아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너무 당연히 받아드리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근대국가(일본강점기 포함) 등장에 따른 관공서의 밀도 높은 통치, 보통교육, 교통-통신의 발달, 방언의 억압과 동화과정을 통해 지금의 형태를 띤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통의 경험이라는 역사가 발굴되거나 날조되고, 국가적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우리와 우리가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끊임없는 과정이 존재했다. 이런 과정은 에스닉한 기반이 약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과정은 지역과 나라마다 독특한 면이 있으며, 따라서 네이션을 어떻게 정의하냐 하는 것도 나라마다 상당히 다르다. 우리처럼 네이션을 단일민족의 정체성으로 보기도 하고, 다민족이 공통의 가치를 기반으로 공존한다고 보기도 하고, 에스닉한 기반 없이 가치에 기반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내셔널리즘은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20세기 초반까지는 민족자결을 보장하는 진보적이고 인도적인 것으로 평가받았으나 20세기 후반 유고 내전과 같은 파멸적인 민족분규를 겪은 다음은 부정적인 평가가 많아졌다. 이런 면에서 에스닉한 기반의 내셔널리즘을 반대하고 보편적 가치에 따른 내셔널리즘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서구 우월적인 신(新)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할 수 있다. 약자의 내셔널리즘은 긍정적으로, 강자의 내셔널리즘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으나 국제사회에서 강자와 약자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에스닉 그룹, 혹은 민족은 같은 국경 안에서도 큰 문제 없이 공존한다. 이들이 파멸적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는 희소한 자원을 두고 이를 차지하려는 정치집단이 이들의 정체성을 자극할 때이다. 이런 면에서 네이션과 내셔널리즘, 민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부터는 내 생각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같은 언어와 역사, 문화를 공유해온 혈연에 가까운 공동체라고 본다면 이는 에스닉 그룹을 바탕으로 한국인을 정의한 것이다. 한국인을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를 바탕으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 파악한다면 이는 가치에 기반하여 한국인을 정의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이를 칼같이 구분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전자로 보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미리 말하지만 어떤 게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배타적이고 후진적인 종족주의로 전락할 수 있으나 잘 관리된다면 엄청난 응집력과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다. 후자는 개방적이고 선진적인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겠으나 잘못하면 구심점 없는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
지금 수시로 불거지는 친일논쟁과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그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이뤄진 경제적 성과에 대한 평가, 북한을 보는 문제에서 나타나는 격렬한 관점의 차이는 바로 한국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냐를 두고 일어나는 사상투쟁이다. 앞으로도 한참 동안 계속될 이 과정의 결과에 따라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이 결정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시사점은 내셔널리즘의 충돌이다. 신냉전의 도래라고도 불리는 현재 상황은 보편적 가치와 민주주의,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의 패권과 이에 반발하여 독자적 가치를 내세우는 중국, 러시아, 기타국가의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전자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내셔널리즘, 후자는 에스닉한 특성에 기반한 내셔널리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이들의 충돌은 내셔널리즘의 충돌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나 보편의 가치를 내세우는 가치관은 에스닉한 소속감에 바탕을 둔 가치관에 비해 구심력이 약하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곳곳에서 좌절된 이유도 민족에 기반한 내셔널리즘을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도 역외 러시아인을 보호하겠다는 이유이고, 중국이 대만을 넘보는 이유도 같은 민족이 두 개의 국가를 이룰 수 없다는 독창적인 가치관 때문이다. 앞으로의 갈등은 에스닉한 가치에 바탕을 둔 내셔널리즘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 특히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희소한 자원을 얻기 위해(예를 들면, 자원, 반도체기술, 영토) 정치인이 불을 붙이기 시작하면 그 끝을 알기 힘들다. 앞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지 못하고 양분된다면, 앞으로 벌어질 투쟁이 우리를 내부에서 찢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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