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사야 벌린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가능하면 서문을 가장 마지막에 읽는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서문은 책 내용에 대한 간단한 서술과 감사의 말이 아니라 그의 논문과 주장에 대한 비난과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먼저 읽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 대한 재반론을 읽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실제로 서문 먼저 읽어서는 그간 사정을 이해하기도 힘들고 책 내용을 스포일러 당한 느낌이 든다.
그가 준엄하게 비판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결정론,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을 왜곡해서 사용해서 사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인간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주장에서부터 인간은 환경과 사회에 의해 사실상 어떤 선택을 할 수 없다고 보는 사회적 결정론까지, 이사야 벌린은 냉소적 어조로 비판한다. 본성에 의해서든 사회적-환경적 요인에서 기인하든, 아예 물리학의 우주론적 사실로서 결정론이든 이를 받아들인다면 개인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 된다. 이런 주장의 사실 여부와 별도로 결정론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도덕도 환상이다. 인간의 모든 결정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행동도 최소한 두 가지의 선택 중 더 도덕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것이 어떤 것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거나 다른 행동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그런 행동에 대한 평가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美學的)인 것이 된다. 도덕적 행동에 대한 찬사는 그의 결정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아름다운 산이나 풍경을 보며 느끼는 찬탄과 같은 것이 된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엄밀히 따르자면 물에 빠져 죽을뻔한 나를 살려준 사람에 대한 감사도 도덕적일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는 행동을 한 것은 그 사람의 결정된 본성이거나 이미 자연과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구해준 것이나 우연히 옆에 통나무가 있어서 내가 살아난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또한, 어떤 흉악범도 도덕적인 비난을 면해야 한다. 왜냐면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것으로 그를 비난하는 게 타당한가?
어떤가? 결정론에 따르자면 나타나는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 본능, 그리고 언어와 사회체계 전부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 두 개의 선택지를 갖고 있고 그가 한 결정에는 그의 책임이 있다는 가정하에 작동한다. 인간이 만약 결정론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사회와 언어부터 모든 것이 붕괴 수준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사야 벌린은 결정론자조차 이런 논리적 귀결을 받아들이거나 이런 결론에 따라 언어를 구사하지도 못한다고 냉소한다.
이사야 벌린은 왜 이렇게 결정론을 비판하는가? 첫째로 이런 사회적 결정론이 자연과학적인 기계론과 환원론을 사회 현상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계몽주의에서부터 이어오는 유구한 흐름이다. 이런 이념의 근본적 가정에서 인간 개인은 물 분자나 공기처럼 몰개성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본다. 벌린은 이를 비판한다. 콩트부터 마르크스까지 인간 사회와 과학적 현상을 동일시하여 어떤 모델에 맞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다. 이런 사고가 개인의 자유에 미친 악영향은 모두 익히 알고 있다. 두 번째로 이런 결정론이 자신의 선택 결과나 좌절을 거대한 운명이나 사회체제와 같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외부적인 어떤 것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약간은 비겁한 인간의 심리에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회피가 쌓이면 결국 자신의 선택을 필수 요소로 하는 자유는 설 자리가 없다.
다음으로 자유라는 용어의 정의를 보자. 자유는 ~~을 할 자유와 ~~으로부터의 자유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소극적 자유이고 후자는 적극적 자유이다. 소극적 자유를 보자. 나는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 수도 있고 짬뽕을 먹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때 이를 막을 제한이 많은가 적은가로 소극적 자유의 크기는 결정된다. 반면 ~~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적극적 자유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로 평가된다. 내가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심지어 나 자신의 해로운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이것이 적극적 자유의 평가 기준이다.
이사야 벌린에게 진정한 자유는 소극적 자유다. 자유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할 공간, 내가 온전히 결정할 최소한의 선택권의 보장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의미로 자유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오히려 이 본질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예를 들어보자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떤가? 전형적인 적극적 자유의 표현이다. 이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 강력한 국가가 개인의 경제활동을 조정하고 가난한 자를 보살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좋은 의도라 해도 이는 분명히 개인의 어떤 선택권을 침해한다. 자유를 높이려는 게 누군가에 자유를 속박하게 된다.
더 나아가 ‘무지로부터의 자유’는 어떤가? 이도 전형적인 적극적 자유의 표현이다. 어떤 사람이 지적으로 열등하고 이기적이고 무지하여 잘못된 선택을 할 때, 깨달은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이 이들을 위해 더 좋은 결정을 내려주는 건 어떤가? 부모가 아이에게 하듯, 교회나 당, 국가가 이들을 위해 더 좋은 결정을 해 주는 게 궁극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더 보장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 논리는 가장 무도한 독재자가 그들의 잔학함을 미화하기 위해 항상 사용하는 것이다. “네가 무지하여 너 자신을 헤치기 때문에 내가 더 좋은 선택을 해 주는 것이다. 나에 대한 복종은 노예화가 아니다. 네가 현명하였다면 당연히 따랐을 훌륭한 가치나 목표, 자아에 대한 복종이므로 너의 궁극적인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대략 이런 흐름이 된다. 적극적 자유를 의도적으로 곡해하여 사용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심각하다. 그리고 달콤하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개인이 숨어서 소속감을 느낄만한 거의 종교적인 무언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극적 자유, 즉 개인 선택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옹호하여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무자비한 자유 방임주의의 피해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신속하게 알아볼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 자유가 주는 달콤함과 파괴적인 결과는 소극적 자유 따위에 비교되지 않는다는 게 벌린의 설명이다.
소극적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는 주장에는 이런 비판도 가능하다. 가난해서 한 끼 먹을 돈이 없는 사람이 최고급 최고급식당에서 식사할 자유가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이 사람은 좋은 식당에 갈 선택의 기회가 박탈된 게 아니다. 좋은 식당에 갈 수단이 없는 것이다. 이 둘은 구분해야 한다. 좋은 식당에 갈 수 있는 계급이나 신분이 정해져서 어떤 사람은 좋은 식당에 들어가 조차 못 할 때 인간의 자유가 진정으로 침해된 것이다. 자유를 공격하고 싶은 의도를 가진 자는 이를 의도적으로 혼동한다. 그리고 평등, 사회질서, 혹은 어떤 가치로 표현되어야 할 무언가에 자유라는 단어를 오용한다.
벌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국가의 탄생과 파시즘의 부흥과 몰락을 목격했다. 19세기의 소란하고 무질서 하나 활력 넘치는 세계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근대 국가는 점점 더 개인의 공간을 위축시키고 아예 인간을 제도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작동하는 부품과 같이 보는 세계관이 힘을 얻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자유라는 단어는 오용되고 남용되었다가 아예 인간이 만들어낸 착각 이거나, 말하기 불편한 무언가로 취급받았다. 엄혹한 시절에 그는 끊임없이 진정한 자유의 정의를 말했다. 그리고 인간을 수동적이고 몰개성적인 부품으로 간주하는 모든 사상적 흐름과 치열하게 다퉜다.
전 세계는 물론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자유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불쾌한 단어이다. 단순히 자유를 내세워 벌인 나쁜 일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국가나 사회가 침범할 수 없는 어떤 공간이 존재하고, 이 공간은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고가 자신의 다른 가치의 실현을 방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평등을 추구한다면 개인의 절대적 재산권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 사회적 안전을 위해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쉽게 무시되어야 한다. 국가나 민족과 같이 사회적 유기체를 절대시한다면 개인의 안위나 선택 따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렇듯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담론이나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유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아예 말을 꺼내기 불편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이게 아직도 우리 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빼려는 집단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행복하려고, 뭔가를 이루려고, 가족을 돌보려고 살아간다. 이게 자기합리화이자 착각일지라도 우리는 내 선택이 침해받지 않을 울타리를 원한다. 그게 비록 잘못되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를 빼앗으면 인간의 존엄한 무언가를 빼앗은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를 지키기 원한다면 자유의 진정한 정의(定義)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유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할 선택권이 최소한 두 개 이상 있다는 것이며 그런 선택이 타인에 의해 방해되거나 금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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