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인 쟁기, 칼, 책은 각각 생산자, 약탈자, 제의-합법화 전문가를 뜻한다. 중세 서구로 보자면 농민, 기사와 영주, 성직자를 가리킨다. 농민은 생산을 담당하며, 기사와 영주는 평화의 유지를 대가로 생산자를 약탈하며 사회를 유지하는 억압자 역할이다. 성직자는 이런 세계에 형이상학적 개념을 부여하고 체제를 합리화한다. 근대사회 이전까지 이런 분업으로 인간 사회가 돌아갔다. 물론 서구사회를 기준으로 일반화한 경향이 있다. 인도는 제의 전문가가 궁극적으로 복잡한 카스트제도하에 약탈자를 길들였고, 동양에서는 도덕적 관점을 제시하는 제의 전문가가 중앙화된 국가를 주도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농업기반 사회에 생산자와 억압자, 제의(祭儀) 전문가의 역할과 분업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역사철학으로 분류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역사철학은 ‘역사 본연의 자세, 목표에 대해 고찰하는’ 철학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역사철학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저자 어니스트 겔너의 목소리로 직접 듣자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여태까지 하나의 사회가, 그리고 오로지 하나의 사회만이, 기적에 가까운 사건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이런 유형의 세계에 도달했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이 세계가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설명하고 유효화하기 위해 기댔던 철학이 순환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 256p
즉, 현대 산업사회는 당연히 일어날 역사의 발전단계가 아닌 여러 복합적 원인의 우연한 결과라는 것과 우리가 우리를 정당화하며 앞으로도 그 정당화가 당연히 지속할 것이라는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하는 ‘인식’은 도구로서 합리적이고 단일 맥락으로서 지시적(指示的)이다. 과학적, 즉 사실이 관찰과 경험, 증명, 최소한 타당한 유추로 설명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무언가를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더는 질병은 신의 징벌이 아니고,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자연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제사상에 실제로 조상의 귀신이 나타난다고 믿으며 제사를 지내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런 도구적으로 합리적이고 지시적인 인식은 대부분 인류가 어느 정도는 받아드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화를 공유한다. 대게 언어권과 일치하는 이런 문화는 우리의 사고와 판단을 지배하는 개념들의 유기적 결합이다. 이렇게 들으면 인식과 문화가 무슨 차이가 있나 생각되지만, 이전 시대보다 현대사회에서 인식은 문화에서 분리되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는 과학적 합리성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문화가 나에 이익을 보장하는 합리적인 선택이어서 지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개념들이 주입된 결과이다.
중세 시대를 상상해보자. 이 시절에 우리가 말하는 합리적 인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거나 문화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생산자는 착취자들을 부양하고 사제이자 제의 전문가에게 위안을 받으며 사후의 구원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합리적 인식으로 그 과정의 기만성을 간파하는 게 쉬운 게 아니며 그런 인식 과정이 사회에 전파되기 전에 억압되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 현재 세계도 주입된 개념 때문에 합리화된 세상이다. 우리 대부분도 현 사회 제도에 근본적인 불합리를 간파하지 못한다. 혹시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현 경제 제도를 비판하는 게 현시대의 불합리를 통찰한 무슨 대단한 인식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마르크스적 관점도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생산자가 억압자를 몰아낸 세계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더 실패했다는 점만 빼면….
말이 샜지만, 결론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인식, 관점은 중세는 물론 수렵-채집사회와도 다르다. 따라서 지금의 인식적 잣대로 이전 사회를 볼 때 심각한 오해가 나타난다. 수렵-채집사회를 보자. 이런 사회는 생산자-억압자-제의 전문가의 분화도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잉여 생산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의 최우선 과제는 생존이다. 단일 맥락에 따른 지시적 판단과 도구적 합리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저기 나무 뒤에 있는 사냥감을 내가 몰 테니 넌 숨어 있다가 잡아라”라는 지시는 도구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그런 합리적 수렵-채집인은 마약성 식물에 취한 상태로 동물의 영혼이나 조상의 영혼과 접하기도 하고 “물소는 무(식물)다”라는 이상한 명제를 사실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수렵-채집민이 뿌연 판단력을 가진 야만인이어서도 아니고, 여러 가지 인식이 합리적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한 PC적 다원주의가 사실에 부합하기 때문도 아니다. 이 두 관점 모두 현대적 인식으로 이전 수렵-채집사회를 판단하거나 합리화하려는 시도이다. 농업 이전의 사회에서 최고의 목표는 생존이고 생존에는 현대사회의 도구적 합리성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족 사이 단결력과 형이상학적 유대감은 부족 생존에 대단히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조상이나 자신의 종족에게 힘을 주는 동물의 유령을 보는 건 우리의 인식으로 사실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종족의 생존에는 도움이 된다. 여름의 몬순성 폭풍을 신의 선물이라는 고대 인도인의 믿음이 우리에게 비과학적 망상으로 보일지라도 몬순성 폭우에 농업을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가 선물처럼 우리에게 매년 주어진다는 결과는 달라질 바 없다. 그 시대 사람들은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다양한 맥락을 가진 통합적 인식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사회는 단일 맥락으로 도구적 사고를 하는 현대사회의 생산성과 역동성에 맞서 생존하긴 힘들다.
수렵-채집사회를 넘어선 농업사회를 보자. 농업사회는 잉여를 바탕으로 한다. 잉여를 관리하고 보관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독점한 억압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회를 영구화하고 합리화할 제의 전문가이자 성직자도 등장한다. 드디어 기능적 분업이 나타난 것이다. 이 사회는 본질상 대단히 억압적이고 정체될 수밖에 없다. 이 사회에서 어떻게 현대 산업사회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가 이 책의 중요한 주제다. 저자에 따르자면 이런 변화는 다양한 조건이 충족된 특별한 상황에서 돌발적이고 일회성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 산업사회의 등장은 인간 사회 진화과정의 당연한 결과도 아니고, 생산수단 변화에 따른 사회구조의 피할 수 없는 결과도 아니다. 이게 저자의 주장이다.
돌발적이고 단 한 번의 도약이 일어난 곳은 모두 눈치챘겠지만 서구사회다. 이곳에서 나타난 봉건주의는 영주-기사 사이의 충성‘계약’과 지위의 유동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근대적이었다. 분열된 무력집단에 비해 중앙화된 사제조직은 무력집단의 무자비한 착취를 제한했고 각 하부사회에 존재했던 부족적 연대감과 우선혼(優先婚) 전통을 파괴했다. 이에 이어 나타난 종교개혁은 부족과 억압자를 벗어나 생각할 수 있는 원자화된 개인을 만들어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열된 무력집단 간 경쟁은 생산을 담당한 농민과 상인을 보다 관대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는 초반 상당히 온건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 유럽의 각 지역에는 강한 투쟁심과 독립심을 가진 자유 농민이 존재했고, 상업의 발달 때문에 등장한 도시는 힘의 균형과 협력 아래 운영되는 사회구조를 유지했다. 이 모든 곳이 조각조각 맞춰진 곳에서 어느 순간 생산수단의 비약적 발전과 이를 억압할 수 없는 정치적 힘의 균형, 그리고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힘의 균형은 억압전문가에서 생산자로 넘어갔다. 이런 변화는 다양한 조건이 운 좋게 갖춰진 곳에서 우연히, 그리고 기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게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저자의 판단은 타당하다. 조선 후기사회에 수공업자와 상인이 점점 발달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 사회가 서구의 자극이 없었어도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이뤘을 것이라는 국뽕 역사학자의 철없는 주장을 저자는 비웃었을 것이다. 조선의 중인이 평민과 천민을 끌어들여 양반 중심의 신분 사회를 파괴하고 기계화와 분업화로 생산성을 극도로 높이는 일이 일어났겠는가? 규범을 평가하는 인식에서 사실을 지시적으로 판단하는 인식의 영원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에 불가능했다. 조선에서 그랬듯 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 아니라 기적이다.
현대 문명은 엄청나게 생산적이고 복잡하다. 인식은 문화와 규범의 평가를 벗어났다. 억압을 담당하는 계급의 등장은 이제는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의 정치 체제는 형이상학적 규범이나 신에 의지하지 않는다. 신은 정치가나 지배층만을 축복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축복하고 우리 자신을 권력의 근거로 삼는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인식은 도구적 합리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문화에서 분리되어 영원히 확장해나갈 기세다. 하지만 이의 부작용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위로해주는 형이상학적 구조를 잃었다. 우리는 부유하고 안락하게 살 수는 있지만, 고난 끝에 신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중세인의 만족감을 구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현대 산업사회를 만들어낸 구조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줄 어떤 구조를 찾을 수 없다. 이게 자본주의와 사회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이유이다.
현대사회의 생산-인식-억압체제는 지속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 초기와 달리 종합적인 조율과 자본 투하, 계획이 필요하여 중앙화된 결정구조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치, 즉 억압의 영역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합리적 도구로서의 인식은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 본다. 즉 과학적 탐구와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의 추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탐구가 인간의 타고난 조건을 조작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게 분명하고 이를 시도할 조건이 될 때, 세상의 생산-인식-억압체제는 다시 한번 변할 것으로 본다.
이것이 이 책의 요점이다. 현대 문명은 기적적인 조건의 결합과 우연으로 단일한 사건으로서 빅뱅을 일으켰다. 이 파괴력은 엄청나서 전 세계의 생산-억압-제의화 구조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그 파장이 너무 커서 우리는 이전 세계의 인식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인식적인 단절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영원할 것이라는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이고 문화적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생산-억압-제의화 구조도 변할 것이라 저자는 본다. 생산은 더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단일한 기준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이는 상당히 으스스하고 의미심장한 주장이다. 다시 정치로 불리는 억압구조가 강화되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두고 경쟁할 것으로 저자는 본다. 삶에 위안을 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따라 다시 세계는 제의화(祭儀化)의 길로 갈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소속감은 문화가 주기 마련이고 문화의 수호자로서 국가가 주목받기 쉽다. 따라서 미래에는 문화를 중심으로 경계가 뚜렷하며 소속감을 주는 어떤 제의적 정치구조가 득세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른바 파시즘의 부활이다. 이게 아니더라도 회사에 대한 충성심에 기반한 일본식 평생 고용제, 종교의 대용품으로서 이데올로기적 교황주의(소비에트씩 독재)가 나타날 가능성도 말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지 않는 시장원리와 합리적 도구성에 기반한 현대 문명은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소련의 몰락과 일본식 종신고용제의 몰락 이전에 쓰인 책이다. 아직 현대적 인식과 생산성에 기반한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점점 위협받는 것 같은 분위기는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소비에트식 교황주의와 일본식 종신고용제가 현재 제도의 대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저자의 으스스한 예상대로 문화, 더 나아가 인종에 기반한 파시즘의 도래는 나타날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의 근본 가정이 파괴되고 부정된다면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대안은 결국 공통된 문화와 언어, 역사를 공유한다는 믿음에 따른 민족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은 저명한 역사학자의 말대로 망상의 공동체이다.
한가지 저자의 주장이 하는 가정은 동의하지 않는다. 앞으로 세계에서 ‘생산’은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미래 사회가 다시 생산자에게서 억압자로 주도권이 넘어갈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이는 복잡한 사회를 운영하고 조율할 중앙집권화된 억압체제가 현재와 같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에 따른 것이다. 이른바 시장 없이도 중앙의 계획이 상당한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경험으로 입증된 바 없다. 오히려 그 반대 사례는 수두룩하다. 이는 저자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후예가 떨쳐낼 수 없는 한계, 혹은 당시 만연했던 마르크스, 혹은 슘페터식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들은 다양한 사회구조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경제적 성과를 똑같이, 혹은 훨씬 높게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혹은 자본주의의 경제성과를 중앙집권적이고 합리적 의사결정 구조가 이어받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근대 이후 인류의 경험적 증거에 반하는 주장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 시장에서 중앙집권화된 조율로, 생산자에서 억압자로 힘의 균형이 넘어간다면 이는 필연적인 사회의 변화라기보다 인류의 퇴행이 될 것이다. 내 경험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강력한 억압자 아래서 생산성이 유지되거나 자유로운 인식이 살아남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저자는 현대 산업사회가 생산이 쇠락하고, 인식은 중세 농업사회처럼 억압받으며, 권위적이고 약탈적인 독재자 아래 살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넘어서서 되돌아갈 수 없다고 보지만 이 책이 쓰인 이후 거의 사십 년간 이런 예는 차고도 넘친다. 만약 저자의 말대로 된다면 인류의 역사는 다른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리라.
앞서 말했듯, 저자는 앞으로 생산이 사회구조에서 중요성이 줄어들고 권력과 지위를 둘러싼 투쟁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즉 정치는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그리고 근대 산업화가 거세해 버린 형이상학적 위안과 제의화를 복원할 어떤 체제가 나타날 것으로 보는 듯하다. 이런 구조를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 제공할 것이고 문화의 전달자이자 지킴이의 역할을 국가가 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국가주의, 혹은 파시즘과 닮은 어떤 것일 것이라 은연중 암시한다. 즉, 인류는 앞으로 중앙집권화되고 구성원에게 제의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권위주의 체제가 부활할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본다. 이 예상이 생산과 인식에 미칠 영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미뤄두고, 그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 혹은 시장은 엄청난 부와 번영을 일으킨 ‘도구’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에서 안식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더는 종교와 사회적 체제 안에서 안식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지금 한국인이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체제는 자기 가족뿐이다. 결혼과 출산이 줄어드는 요즘은 완전히 원자화된 개인이 늘어난다. 친교와 습관 때문에 종교를 따르는 사람은 많아도 중세인이 믿었던 완전한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위안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이런 위안이 사기와 기만에 근거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나마 종교를 가진 사람도 한국뿐 아니라 서구사회에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인간은 고찰하는 존재라기보다 위안과 구원을 바라는 존재다. 현대사회에는 이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개념과 문화를 다시 제의화하는 형이상학적 구조를 다시 제공하겠다는 어떤 구조가 생길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 있다. 그 구조가 생산성의 지속과 인식의 확장과 동반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현대 산업사회에 다른 대안은 없을까? 생산자에서 억압자로 권력 이동 없이 생산성은 더욱 증가하는 세상 말이다. 위안과 구원을 약속하는 새로운 사기와 협잡 없이 아니라 현실과 경험에 의존한 새로운 인식이 인간에게 위안과 구원을 줄 수는 없을까? 그래서 생산과 인식의 확장이 지속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이런 기회가 아직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이 그 기회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는 내 확증편향일지도 모른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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