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과학적 이론을 내세우기 위해 인간은 두 가지 방법을 쓸 수 있다. 첫째, 경험적으로 축적된 사실에 근거해 타당한 모델을 끌어내는 것, 두 번째, 논리적 추론을 통해 현 상황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후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을 얻기는 힘들다. 특히 사회과학이나 철학과 같이 자신만의 뇌피셜이 형이상학이 되고, 자신만의 논리의 성에서 상대방을 ‘논파’했다고 선언하는 정신승리가 창궐한 곳에서는 더 그렇다. 모든 가치 있는 사실과 이론에는 검증과 경험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근대를 일군 계몽주의부터 그 후계자들의 철학에서는 ‘천부인권’과 ‘사회계약’을 빼놓을 수 없다. 한마디로 아주 예전에 자연상태에서 양도할 수 없는 어떤 ‘권리’를 가진 각각의 인간이 합리적 선택으로 서로 간 ‘계약’을 맺어 사회와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레퍼토리다. 로크, 루소, 홉스 모두 이런 서사로 근대적 사회의 맹아 부르주아 계급과 그들이 주도한 새로운 사회를 합리화했다. 전형적으로 ‘논리적 추론을 통해 현 상황을 설명할 어떤 모델’을 제시한 후자의 경우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천부적 권리’와 ‘사회계약’은 비직관적일뿐더러 당연한 사실 일리도 없다. 인간이란 종이 나타난 시점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인간은 씨족집단이든 부족 집단이든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맥락으로 태어나고 길러진다. 근대 이전 어떤 사회에서도 개인으로서 인간을 어떤 침범할 수 없는 인권을 가진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했던 예는 없다. 하물며 자유롭고 천부적 권리를 가진 개인들이 서로 만나서 서로의 이익을 고려하여 사회를 형성했다는 이야기는 몽상 수준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벌꿀과 물소, 침팬지가 그랬듯 사회적인 동물이다. 물소에게 “너는 너의 이익을 위해 다른 물소와 사회적 계약을 했니?”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난센스다. 적대적 환경에 대한 생존책으로서의 인간의 집단생활은 Homo sapiens 이전부터 이어온 본능으로 보는 것이 조리와 경험칙에 비춰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바보스러운 이론이 아직도 경전처럼 읽히고 아직도 중고등학교 시험에 나오는가? 이전에 말했듯 로크, 홉스, 루소가 이런 이론으로 옹호했던 사회체제와 새로운 우세계급이 최종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천부적 인권, 아니 어떤 타고난 권리라는 말 자체가 서구 봉건사회 지배계급의 생득권(birthright), 여기서 더 발전한 왕의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에서 유래했다. 힘이 왕과 귀족에서 제3계급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생득권을 너희만 갖는 게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 천부인권의 기원이다.
거기에 사회 시스템의 근원으로서의 ‘합리적 계약’은 당시를 관통하던 이성과 합리성의 그림자이다. 그 시대에 사회적 합리화와 합법화는 신비적 제의나 신적 존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의 명령이니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라는 수준의 주장은 더는 권위를 얻지 못했고 규범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시대에 권위를 주는 것은 이성과 합리성이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의 형성을 최고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해줄 권위는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계약’에서 나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⓵인간은 천부적 인권(너희 앙시엥레짐의 지배자들만 갖는 생득권이 아니라….)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 ②사회적 계약(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에 따라….)으로 사회와 국가를 형성했다.”라는 설명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새로운 지배계급의 등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존에 소수만 독점하던 ‘생득권’을 모든 인간에게(그럼으로써 당연히 부르주아 계급에게도….) 확장하고, 당시에 맹위를 떨치던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정당화 수단과 거칠게 결합한 것이다. 이게 근대 계몽주의 사회계약의 본질이다.
이런 두 가지 개념은 각각, 혹은 합쳐져서 지금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1번은 근대 사회의 인권의 개념을 직접 낳았다. 2번은 아직도 이성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를 주장하는 현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철학자들이 새로운 경전으로 삼으려고 물고 빠는 존 롤스의 ‘정의론’은 무지의 베일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이 이런 합의에 이를 수 있다며 자기 뇌피셜을 써 내려간다. 최소한 계몽주의 철학자가 사회적 계약이란 개념을 당시 탄생 중인 새로운 사회를 합리화하려 한 것에 비해 존 롤스는 자기 생각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했다는 차이점은 있다. 이렇듯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개념은 아직도 합리적으로 세상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무지하고 위험한 인간들 머리에 불길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책 서평을 쓴다면서 뭔 소리를 길게 하냐 싶었겠지만 다 이유가 있다. 위에 말했듯 합리적 계획과 모델로 세상의 본질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원리로 세상을 다시 구성할 수도 있다고 믿는 인간들은 대부분 하이에크가 말한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이며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상극이다. 자유주의 사상가는 공통으로 경험과 실제 사회현상에서 이론을 끌어내지 자신의 이념과 모델에 세상을 끼워 맞추려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은 부와 번영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이런 방법이 비인간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낳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인간의 그간의 관습과도 배치될지라도 말이다.
자유주의적 사고는 이렇다. 정의, 민족, 국가, 어떤 것이든 거대한 무언가를 내세우며 사회에 기생하는 바로 옆집의 이웃보다 배추를 키워 싼값에 시장에 내놓아 내가 먹는 김치를 저렴하게 해주는 중국의 농민이 나에게 더 이로운 사람이다. 거대한 관료조직 위에 군림하며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자리를 나눠 가지려는 우리나라의 정치계의 기생충들보다 중소기업에서 혁신적 기술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 일본의 연구자가 나에게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내 진정한 이웃은 나를 돕는 사람이다. 나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국경과 민족, 종교를 넘어 시장에서 나와 비인격적인 거래를 하는 사람이다. 어떤 문화적-관습적 동질성이 아니라 시장에서 단일한 목적과 도구를 이용해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진정한 내 이웃이다. 시장이 존중받을 때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가장 잘 보장된다.
어떤가? 위 주장은 어떤 종교적 이념적 주장보다 사실에 가깝지만, 인간의 관습과 본능에 배치된다. 인간은 원래 우리(민족이든, 씨족집단이든, 국가든)를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정당하다는 관습과 본능 아래에 살아왔다. 이 때문에 이웃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전쟁에서 적 전투원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소속감을 주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갈구한다. 이를 확장하여 투사한 것이 친족-민족-종교-국가다. 얼굴도 모르고 서로에 소속감과 충성심도 없는 비인격적인 시장에서의 거래가 너에게 이득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이득이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상당히 거부감을 준다.
위에 내가 한 말을 보라. 나는 중국의 농민과 일본의 기술자가 우리나라의 별 기여가 없는 인간보다 진정한 내 이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나라 사람보다 자기 이익만 내세우고 국가와 민족과 같은 중요한 집단을 무시하는 인간이 아니냐고 비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유주의자처럼 생각한다면 인류를 가장 위협하고 억압하는 전쟁과 집단 간 갈등, 착취적인 국가, 비효율적인 관료제, 빈곤은 사라진다. 배타적인 사회집단이 아니라 인류 자체가 도약한다는 말이다. 당신이 중요하다는 모든 집단은 그냥 기만과 사기, 위협, 개념의 무비판적인 주입의 산물일 뿐이다. 현시대의 가장 강력한 사회구조인 국가는 질서 유지라는 최소한의 역할만 할 때 인류는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이게 안 되는 이유는 인류가 우연히 얻은 시장이라는 도구가 인간의 본능과 관습, 이미 존재하는 사회구조의 기득권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모든 자유주의 사상가는 어떤 전제를 선언하고 이 전제에서 논리적 추론을 통해 모델을 완성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있는 사실에서 비직관적이고 비관습적이지만 타당한 이론을 끌어낼 뿐이다.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모두 천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 사실이라기보다 개인의 권리를 법적-관습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사회는 번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종교적-민족적으로 의미 있는 시조에 의해 창립되었거나 이성적 합의에 따라 확립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투쟁 과정에서 그 지역에 나타난 가장 강력한 사회집단으로 보는 게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유주의 이론은 인기가 없다.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고 소속감과 지적 충만감을 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미제스,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머리 로스버드와 같은 학자의 이름이 생소한 것이다. 자유주의적 이론가는 기존의 이성과 계획에 따른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심각한 문제점, 본질에서 인간의 이성과 계획의 유한함을 지적하고 고고한 학자의 서재가 아니라 떠들썩한 잡인들이 모이는 시장에 사회를 맡기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 노직의 책은 충격이었다. 노직은 근대 계몽주의 이론가와 그 후예가 하듯, 논리적 추론에 따라 물샐 틈 없는 이론을 구성하여 자유주의적 이념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노직은 최소한의 야경국가만을 정당하다고 본다. 인간의 권리, 특히 재산권은 천부적인 것으로 사회적 어떤 실체에 의해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고유권으로 본다. 따라서 질서 유지 이외의 일을 계획하려는 국가는 개인의 천부적 인권을 침해한 것이다. 세금도 이런 관점에서 부당한 것이고 인권의 핵심적 요소로서 개인의 재산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침해다. 상당히 인상적이고 가장 선명한 자유주의적 시각이다.
다른 자유주의 사상가와의 차이점은 이것이다. 다른 자유주의 사상가는 “국가의 기능을 제한하고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해야” 사회의 번성과 인간성의 진정한 존중이 보장된다고 말한다. 노직은 국가의 기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전자가 형이상학적 논증을 의도적으로 피한다면 노직은 개인의 자유에, 재산권, 야경국가가 형이상학적 논증을 통해 확실히 입증된다고 주장한다.
그 입증과정은 이렇다. 우선 천부적 인권은 로크의 자연권이론을 인용한다. 인간은 타고난 권리를 갖고 자유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 상호 간의 갈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보호 협회’를 형성한다. 보호 협회의 내외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자발적인 협회이다. 이 ‘보호 협회’를 효율화하기 위해 전임 관리자(?)를 선정하고 그에게 돈을 지불하기 시작하고, 이런 ‘보호 협회’ 중 ‘우세한 보호 협회’가 발생한다. 어떤 지역에서 완전히 우세해진 ‘보호 협회’가 특정 지역 전체 인간 사이에 폭력과 중재, 보복을 독점하게 되면 ‘극소국가’가 형성된다. 여기서 보호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인간에게까지 폭력과 중재, 보복을 강제할 수 있으면 ‘최소국가’가 형성된다. 이렇게 최소국가는 인간의 합의와 어느 정도의 용인으로 지역 내에 질서 유지의 권한을 갖게 된다. 어떤가? 이른바 자유주의자 버전의 사회계약론이다.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이 비현실적이고 도식적인 것과 같이 노직의 그것도 비현실적이고 도식적이다.
인권의 중요한 구성물로서 재산권은 왜 정당한가? 로직은 로크의 이론을 비슷하게 사용한다. 우선 최초의 소유권은 아직 충분한 자원이 있는 상태라 남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가진 무언가를 어떤 것에 투입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즉 세상에 많은 흑요석이 있고, 내가 그중 하나를 가져다 잘 갈아서(내 노동력을 투여해서) 돌칼을 만들었다면 이게 최초의 소유권 취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의 정당한 소유권은 이전으로 발생한다. 그 돌칼을 내가 B에게 어떤 대가를 받고 이전했다면 B의 소유권도 정당하다. 그리고 이런 순서의 이전과정에서 어떤 부당함이 있었다면, 예를 들면 누구의 소유권을 강제, 사기 등으로 취득했다면 이에 대한 교정을 위한 소유권의 조정도 정당하다. 즉, 취득, 이전, 교정의 관계에서 소유권은 창조되고 이동되며 이 과정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유권에 대한 대단히 도식적이고 조야한 정당화다. 이는 마치 왕권신수설의 정당화와 비견된다. “최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정당한 통치권을 부여했고, 왕은 이런 아담의 정당한 후계자임으로 왕의 권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과 같다.” 신이 아담에게 권리를 줬고, 아담은 왕들에게 권리를 이전했으니 왕의 권리는 정당하다는 논리다. 이렇듯 노직의 논리는 ‘소유권 신수설’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위의 도식적 소유권의 정당화 이론을 노직이 설명하는 최소국가의 탄생 배경과 이를 거칠게 결합하면 “정당한 소유권을 최소국가가 그 탄생의 정당한 권한을 넘어서 침해하는 것은 부정의 한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놀랍게도 이게 노직 주장의 전부다. 대부분 철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그렇듯 세세한 문제와 개념을 자신의 이론에 끼워 맞추려는 지루한 설명은 있지만, 핵심은 정말 이게 전부다.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 그 후계자들의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적 이론이 모두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것과 같이 노직의 이른바 자유주의 버전의 사회계약론도 공허하고 비현실적이다. 이런 부류의 논증이 말이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논증이 진실이나 사실을 찾아내거나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자유주의 사상가가 자유주의가 실제로 작동하는 도구임을 설명하려 한다면 노직은 자유주의가 정당하다고 합리화한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지식인의 역할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과학자상은 근대 이후 지식인이 체제의 합리화 전문가이자 제의 전문가 역할에서 풀려난 이후에 나타났다. 이제 학문이 어떤 이데올로기나 체제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현학적인 모델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진실을 찾는 것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지식인의 합리화-합법화 기능과 형이상학 모델을 제공하는 기능이 점점 퇴색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노직의 자유주의적 사회계약모델은 이전의 사회계약모델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고 허망해 보인다.
내 생각에 자유주의는 정당화와 합리화가 필요한 이념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서술이다. 시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발언의 의미는 시장이 정의롭다는 말이 아니라 시장이 번영과 인식의 확장을 지속할 수 있는 도구라는 뜻이다. 이 도구를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문명은 인류가 우연히 얻었고, 쉽게 파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도구를 버리거나 억압한 사회는 경제-사회적으로 퇴보했다.
대부분 인간은 소속감과 안정감, 정신적 구원을 제공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구조를 갈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그런 구조가 종교-제의와 일체화된 사회구조였다. 이런 구조를 근대적 산업사회가 파괴하였다. 이제 인간은 영혼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하고 교회에 가지 않고, 조상의 확실한 현현(顯現)을 믿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산업화한 세속국가에서 이전 신을 대체할 새로운 신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국가와 민족이 유력한 후보다. 그리고 어떤 형이상학적 안도감과 소속감도 주지 못하는 현시대의 작동원리로서 시장을 저주한다.
그러나 이는 유용한 도구와 마음의 안식처를 혼동한 결과이다. 미제스,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모든 자유주의 사상가는 이 점을 지적한다. “마음의 안식처와 당신의 삶의 원칙은 제발 알아서 찾으라. 그리고 당신의 주관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라. 제발 시장원리는 유용한 도구로 내버려 두어라.” 어떤 사상가도 자유주의의 원리를 천부적이며, 이 원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정당한 것이 논리적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 사상가의 주장은 탄탄하고 강력하다. 사실관계의 냉정한 설명 앞에 개인적 뇌내망상이나 광신자들의 선동이 먹힐 리 없다. 단지 대부분 사람이 냉정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뿐이다. 그 대신 인기를 끄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대함을 강변하는 광신자들의 연설과 이성적 계획으로 따듯하고 완벽하며 부유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계몽주의의 마지막 남은 화랑의 후예들의 달콤한 이야기이다.
내 생각에, 그리고 저명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말하듯, 자유주의 원리는 도그마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어떤 도구에 대한 사용설명서이다. 도구에 대한 사용설명서이자 작동원리를 규명한 것일 때, 자유주의적 사고는 강력하다. 자유주의적 사고를 마치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정당한 도그마로 포장하는 순간 이전의 수많은 헛소리처럼 경험-관찰결과와의 불일치 때문에 웃음거리가 될 운명이다. 이런 면에서 노직의 주장은 자유주의의 핵심과 본질을 변호하는데 부적합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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