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971년 대륙의 두 강대국 소련과 중국의 갈등을 파고드는 핑퐁외교로 중국을 소련 소비에트권에서 분리해 냈다. 이 결과 강력한 공산주의 국가 사이는 분열되었고, 소련은 서쪽 나토와의 안보문제뿐 아니라 우랄산맥 동쪽에 만성적인 안보 불안을 안게 되었다. 결국 압박을 못 이긴 소련이 미국과의 화해모드(데탕트)에 나서게 하였고, 이는 결국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 개방(글라스노스트)으로 이어졌다. 이 묘수를 고안하고 실행한 인물이 바로 키신저다.
이런 성과를 군사력으로 만들어 내려면 얼마나 큰 비용과 위험이 따랐을까? 창의적인 외교 발상은 이렇듯 국가의 장래를 바꿔버릴 힘이 있다. 문제는 인간과 사회가 창의적이기 힘들다는 점과 창의적 계획을 밀어붙일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헨리 키신저라는 인물을 주목해야 한다. 키신저는 1970대 미국에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지만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비난받았다. 이념이 아니라 냉혹한 국익을 최우선으로 무자비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피노체트와 같은 잔혹한 군사정권을 지지했고, 좌파 정부를 전복하였다. 위에 말했듯, 소련과 중국의 갈등을 파고들어 소련을 압박한 것도 그다.
미국이 만약 1970년대 인권과 보편적 가치를 들먹이며 중남미의 좌파 정권을 힘으로 분쇄하지 않았다면? 20년 전에 전쟁까지 한 공산주의 중국과는 이념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미국이 철저한 국익에 근거해 국가의 전략을 짜지 않았다면 지금 사는 세상은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외교는 국제 정치다. 누구도 남을 위해 정치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피를 안 보고 조율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정치는 비스마르크가 말했듯 "가능성의 예술"이다. 결국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모든 가능성을 이용해야 하는 게 외교다.
이런 면에서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기초로 하여 외교정책을 쓰지 않는 위정자는 부패한 것이다. 단순히 멍청한 것이 아니다. 멍청함에는 죄를 묻기 힘들다.
예를 들어 명청 교체기의 조선왕조의 숭명정책을 보자. 겉보기에는 성리학적 화이관이라는 이념을 현실보다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의 지배층은 당시 신분 질서를 보장하고 합리화하는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국가의 존망보다 중요시한것뿐이다.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세계관이 침범받느니 차라리 극히 불리한 싸움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당시 지배층이 실제 세상의 질서와 도덕관에 입각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하자.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마저 속인 것이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러시아 관련 발언은 이런 면에서 우려스럽다. 국내 정치야 집안싸움이니 그 파장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국제정치인 외교는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가 말했듯, 국가는 강철 새장에 갇힌 새나 마찬가지다. 심판도, 도망갈 곳도 없는 곳에 갖혀 투쟁해야 할 운명이다. 당연히 모든 국가는 서로를 편집적으로 의심한다. 외교적 언사가 두루뭉술하고 예의 바른 이유가 바로 서로 간의 편집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러시아도 한국의 처지는 알 것이다. 미국이 손목을 비틀면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 처지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목을 비틀면"과 "하는 시늉"이다.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최대한 하기 싫은 일을 하는척 하는게 국익에 가장 부합한다. 이에 따라 비살상무기를 적당히 지원하고,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있으면 제3자에게 전달하는척 하며 탄약 정도를 공급해 왔다. 우리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이 정도다. 키신저처럼 현실적이고 과감한 결단을 바라지 않더라도 국가수반의 말 한마디에 외교적 참사가 일어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외국, 그것도 서방의 매체와의 대담에서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를 자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게 처음도 아니다. UAE 방문 당시 "UAE의 적은 이란이다"라는 말도 대단히 부적절 했다. UAE가 무서워하는 게 이란인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걸 멀리 있는 우리가 섣불리 이야기해서 얻는 게 뭔가? 이란도 지금의 언젠가 우리와 경제적으로 협력했을 때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나라다. 멀리 있는 이란을 굳이 자극할 이유가 있었나? 우습게도 사우디와 이란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이제 각 국가수반이 서로를 국빈 방문할 태세다. 당연히 UAE와 이란의 안보 문제도 극적으로 해소되고 있다. 느닷없이 우리만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한 번이면 몰라도 두 번은 단순히 대통령의 캐릭터 문제가 아니다. 외교-안보라인의 경직성과 실패의 문제다.
프랑스 마크롱은 "대만 문제는 유럽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타당한 면이 있는 말이다. 역으로 "우크라이나 문제는 동북아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도 타당하다. 우크라이나는 우리와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곳이고 러시아는 최소한 동북아에서 우리에게 큰 위협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첨단기술을 저렴하게 이전해주었고, 앞으로 경제적으로 협력할 여지가 큰 나라다. 한국과 서구 언론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주장과 달리, 이 전쟁은 어떤 도덕적-이념적 정당성도 내세울 것이 없다. 그저 우둔하고 무계획적인 서방의 동진정책이 러시아의 반격을 불러온 것뿐이다.
결국 미국과 서구는 러시아를 저지하고 패배를 안겨줄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봉쇄하지도 못했고, 군사적으로 압도할 수도 없다. 직접 개입할 용기가 없는 유럽 국가 간 이견도 심화되고 있다. 제3 세계는 눈치를 채고 이 분쟁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 전쟁이 중국의 최대 약점인 에너지 부족과 북쪽의 안보 위험을 한 번에 해결해 준 것이다. 미움받으며 왕따 되는듯 했던 중국은 이를 이용해 역으로 유럽과 미국의 틈을 벌리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중동 국가와 중남미 국가가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모양새다.
미국은 러시아의 자원과 인력을 대리전으로 소모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미국과 서방의 유-무형의 자원도 급속히 소모되고 있다. 게다가 서방은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이 전쟁은 핵전쟁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협상으로 끝난다. 언제 끝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떻게 끝날지는 거의 확실하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하거나 최소한 영향권 아래 넘겨주고 끝난다.
이것이 너무 자명하므로, 위에 말한 헨리 키신저는 러시아에 영토를 할양하고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려 작년 6월에 말이다. 만약 키신저의 말대로 했다면 미국의 명성은 금이 갔겠지만, 최소한 러시아와 중국의 밀착을 방해하고, 중국이 반미-중립 경제블록을 결성하는 것을 저지했을지도 모른다. 겁먹은 유럽을 결집하여 유럽을 미국의 안보동맹을 확고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의 외교정책은 키신저의 그것의 정반대다. 국익보다 희한한 이념과 가치관을 내세우며 실패한 기존의 정책을 우둔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우리가 느닷없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암시하는 게 적절한가? 미국이 팔을 더 세게 비튼다면 "제발 제3국에 수출한 것으로 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폴란드나 발트삼국쯤에 보내주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치자. 느닷없이 서구적 가치관과 도덕적 잣대를 러시아에 들이대고 "똑바로 안 하면 우리도 가만 안 있겠다"라는 선언을 하는 게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 정말 러시아가 북한을 무장시키고 동북아의 플레이어로 나서면 어쩌려고 하는가?
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고통받는 우리가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저 멀리 우크라이나 문제를 두고 선명한 도덕성과 친미 외교 노선을 내세우는 게 미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 장단을 맞추는 동안 북한은 가공할 핵 능력을 확보했다. 미니 포세이돈과 같은 수중 드론부터 극초음속 미사일까지 북한의 투발 수단은 사실상 미국과 한국의 방어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전쟁시 북한의 핵무기를 사전에 제거할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다. 일단 핵 공격을 맞고 핵으로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뿐이다. 그 보복 수단조차 미국의 의지에 달려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남의 전쟁에 참견하려 하는가?
이재용회장이 말했듯, 친구는 많을수록 좋고 적은 적을수록 좋다. 친구를 만들기 위해 누가 적인지 선명하게 하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러시아, 중국, 이란, 어떤 나라든 미국의 적이 곧 우리의 적은 아니다. 세상의 엄혹함이 우리에게 편을 명확히 하도록 강요할지라도, 최대한 유연하게 행동하여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지금 한국은 미국의 외교 안보노선을 충실하게 따른 댓가로 북한의 심각한 핵 위협과 중국으로 부터의 고립에 시달리고 있다. 내준 것은 많은데 얻은 게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깨달은 것이 없다면 한국은 그대로 멸망해도 할 말이 없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핵 능력을 국제적 갈등을 최소화하며 확보하는 것, 그리고 최대한 갈등 없이 중국을 중심으로 BRICS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진영에 젓가락을 올려놓는 것이다. 미국의 확장억제가 충분하다느니 우리는 핵무장이 필요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인물이나, 분리되는 경제 공급망에 미국편에만 서는 게 정답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인물은 내 생각에 멍청이거나 거짓말쟁이다. 그 반대편에서 한국의 586식 국수주의적 좌파운동에 오염된 사람도 멍청이나 거짓말쟁이다. 세상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지능을 갖추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당파적 이익을 위해 거짓말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지금은 현명한 지성과 당파성을 넘어 국익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진실함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 동북아를 포함하여 미국의 외교-안보 전략은 한국에게 정말 위험하고도 대가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아젠다가 포함된 우리의 외교-안보 전략이 필요하다.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불운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강하게 집결하지 못하는 편에서, 정치적 자원 없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산적한 외교 안보 문제는 답이 없고 한국 내부를 갉아먹는 근본 문제의 해결도 요원하다. 때마침 세계 경제는 얼어붙고 있고 1-2년 안에 크게 위축될 것이 확실하다. 그때가 되면 배고파진 국민들은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희생양 삼아 대통령을 매달려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지율이 1%가 되어도 해아 할 일은 하겠다고 말했다. 정치적 타협이 힘든 국내 정치문제에 꼭 그렇게 해주길 나는 바란다. 그렇다면 당장의 평가와는 별개로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는 결연한 의지와 돌파력이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과 신중함에서 나온다는 것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런 면에서 대통령 주변의 외교-안보 관련자가 대통령에게 적절한 조언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는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ps. 이 글을 올리는 순간에 윤석열 대통령이 대만 문제와 관련하여 로이터와 한 인터뷰가 세 번째 사단을 만들어 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만해협 문제는 힘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 때문에 발생했으며... 한국은 국제사회와 더불어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절대 반대"한다고 말했다. 대만 갈등은 중국 때문이며 우리는 국제사회(미국과 일본)와 함께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원칙론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미국의 입장을 읊은 것이다. 미국의 안보실장이 했다고 해도 아무 위화감이 없을 발언이다. 이 정도면 윤석열 대통령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자제해야 한다.
중국은 대만이 독립하거나, 중국의 영향권에서 멀어지거나, 중국의 침공을 방어할 만한 효과적인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건 외교적 기정사실이다. 수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여러 보고도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 즉 가까운 시일에 일어날지 모르는 대만해협에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은 현존하는 위험이다.
여기서 한국의 살길은 북한 핑계를 대고 이 분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출격하여 직접 중국을 공격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고, 가능하면 주한미군이 분쟁에 동원되는 일도 최대한 막아야 한다. 즉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미국 편에서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거의 미국, 일본과 함께 참전할 기세다.
정말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에 이런 외교적 문제를 반복해서 일으키는 것이라면 대통령 개인의 신념은 대한민국의 신념을 대표하지 못하며, 정제되지 않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외교-안보정책에 영향을 주어서도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우리도 참전이라도 할 것인가? 평택이나 제주도에서 출격한 미군이 중국을 직접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그러면 중국의 미사일이 주한미군 기지 뿐 아니라 우리의 기간시설에 꽂히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해상 봉쇄로 굶어죽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위협한다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싸워야 한다. 이건 혐중 정서와 상관없는 우리의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대만을 위해 우리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윤석열 정부는 우리의 핵 자위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거나 분단되는 경제 블록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입을 닫고 외교적 모호성이라도 유지해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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