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거대한 체스판, 한 세대 전 유라시아 대륙을 보던 미국의 계획

 


이 책의 저자 Z. 브레진스키는 학계, 정계에서 미국의 국제전략 수립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브레진스키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명확하다. 2000년 당시 ‘세계 일등 지위(global primacy)’를 누리고 있던 미국이 이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브레진스키가 보기에 미국의 세계 일등 지위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효과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러한 위치를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분명한 목적에 따라,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관리(manage)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라시아 대륙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달린 ‘체스판’이다. 미국은 “고대 제국의 용어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속방 간의 결탁 방지하고, 안보적 의존성을 유지하고, 조공국을 계속 순응적 피보호국으로 남아있게 만들고, 야만족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브레진스키가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가 보기에 유라시아의 체스판은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된다. 중앙부(Middle space)에 러시아가 존재한다. 2000년 당시 약화하고, 혼란스러운 나라지만 잠재력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는 러시아가 러시아인의 독자적인 정체성인 ‘유라시아주의’로 경도되어 독자적이고 팽창적인 지정학 전략을 추구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러시아는 서방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서구사회에 우호적인 손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유럽의 확장을 방해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또한, 러시아를 완전한 서구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NATO나 유럽 연합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게 해서도 안 된다. 이는 러시아의 서구화가 아니라 서구의 유라시아화가 될 것이고,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훼손할 것이다.


유라시아 체스판 서쪽에 유럽이 있다. 미국과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으로 친밀한 곳이지만 점점 활력과 목적의식을 잃어가는 곳이다. 게다가 유럽의 진정한 동쪽 경계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미국이 돕지 않으면 유럽의 통합은 좌절될 것이다. 분열되고, 쇠퇴하는 유럽은 미국의 이익에 치명적이다. 유럽은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서 힘을 발휘하는 교두보다. 유럽의 통합과 확장, 나토와 EU의 일치를 통한 대서양주의 경계의 결정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이를 전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독일과 프랑스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여기에 독일-프랑스-폴란드 축의 연대,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까지 연결되는 확고한 연대가 필요하다. 특히 서구사회의 확장에 따른 동진에 필수적인 곳이 우크라이나다.


유라시아 남쪽에는 브레진스키가 ‘유라시아의 발칸’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던 화약고와 비슷하다는 의미다. 이 지역은 중동, 아나톨리아, 파키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신생 독립국으로 구성된다. 인종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분열된 이 지역은 휘발성이 강하다. 특히 북쪽의 러시아, 서쪽의 터키, 남쪽의 이란, 서쪽의 파키스탄과 인도, 등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들이 속속 영향력을 펼치면서 만성적인 투쟁과 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단일한 국가가 이 지정학적 공간을 통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이 지역에 대한 세계 공동체의 금융, 경제적 접근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일한 국가란 사실상 러시아를 지목한 것이다. 러시아가 이 지역을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제르바이잔이 중요하다. 아제르바이잔은 중앙아시아가 세계로 나가는 병목 구간이다. 이 지역을 러시아가 통제한다면 중앙아시아 신생 독립국과 주변국에서 러시아의 발언권은 극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이제 동아시아다. 여기에 중요한 파트너는 일본과 중국이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진정한 아시아국가가 아니다. 역사적 이유로 일본이 지역 패권국으로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파트너로서 전 세계적인 문제에 관여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여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역할을 맡기는 것은 피해야 한다. 중국의 힘은 이미 동남아와 주변국에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 베이징의 입장은 무엇인가?”로 표현되는 영향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 성장과 번영을 위해 서구와 미국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하다. 따라서 미국은 섣불리 중국을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일본과 중국, 미국의 삼각 균형을 통해 중국을 미국에 친화적이고 개방적인 나라로 이끌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중국에 민주주의를 끌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유럽이 미국의 교두보이듯, 중국은 동쪽에서 미국의 닻이 되어야 한다.

브레진스키는 이런 방식으로 체스판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기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다양성을 촉진하여 미국의 세계 일등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가 출현하거나, 적대적 반패권 동맹의 등장을 막는다. 중기적으로 범 유라시아 안보체제의 동반자(유럽,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기타 지역 강국)와 협력을 강화한다. 장기적으로 이런 협력을 통해 정치적 책임을 분담하는 전 지구적 기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가 범유라시아안보체제(TESS, Trans-Eurasian Security System)라고 부르는 이런 전 지구적 협력체는 북대서양조약기구, 그리고 이와 협력하는 러시아, 미국과 쌍무적 안보 관계로 엮인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기구의 출현은 점차 미국의 짐을 덜어주는 한편, 안전판과 중재자로서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영속시켜 줄 것이다.



이 책은 2000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미국의 ‘세계 일등 지위’가 정점에 이른 시기다. 25년 전에, 미국의 국제전략에 깊이 관여한 학계-정치계의 거인이 미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 책을 읽는 것은 두 가지 큰 즐거움을 준다.

첫째, 미국의 현재와 책이 제안했던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브레진스키의 조언을 따르자면, 미국은 유럽의 통합을 확고히 지지하고, 러시아를 서구로 끌어들이고,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적대하지 말았어야 한다. 일본은 동북아의 지역적 역할이 아니라 미국의 파트너로서 평화적이고 세계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유라시아의 화약고에는 얼씬거리지 말고, 여기를 누가 차지하거나 전쟁이 안 나도록 관리만 해야 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유라시아에서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는 것과 반패권 동맹(아마도 러시아-중국-이란이 참여할 것으로 보이는)의 등장을 막아야 한다.

지금 보면 거의 제대로 된 것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유럽은 아직도 허약하다. 러시아와는 서구화하기는커녕 유럽, 미국과 사실상 전쟁상태다. 미국은 여러 차례 유라시아의 화약고에 직접 개입했다가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중국이 온순한 미국의 ‘닻’이 되기는커녕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가진 적대적 경쟁자로 등장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을 군사화하여 이에 맞서고 있다. 최악의 결과는 브레진스키가 그렇게 걱정하던 최악의 결과, 반패권 동맹이 사실상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러시아-중국-이란에 더해 핵무기를 가진 북한까지 이에 가담했다는 정도다.

둘째, 브레진스키의 조언에 기초가 된 그의 판단과 예측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채점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판단과 예측 없이 미래를 조언할 수 없다. 내일 비가 온다고 판단-예측하지 않고 누군가에 우산을 가지고 나가라고 조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미국의 현실과 미국 패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대단히 정확하게 본다. 당시 미국의 패권이 우수한 조직, 경제, 기술뿐 아니라 “미국적 삶의 방식에 대한 모호하면서도 심대한 문화적 호소력, 미국 정치-사회적 엘리트가 지닌 경쟁력과 역동성”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미국 패권이 사실상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동맹과 연합의 정교한 체제에 의해 떠받쳐지며, 이 체제는 계서제적 피라미드가 아니라, 서로 얽힌 미국적 체제의 중심에 미국이 서 있는 모양새”라는 점이다. 즉 미국은 패권국이라기보다 미국적 세계 체제의 운영국이라는 것이다. 이 체제는 힘이 아니라 정당성과 자발적 동의에 크게 의존한다. 브레진스키의 지성이 빛나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이후 그의 조언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예측과 판단은 맞는 것이 별로 없다.

미국이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경제 규모와 기술력이 상당 기간 우위를 점하리라는 예상은 틀렸다.

총 제조품 중 미국이 차지하는 몫은 대략 30% 정도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기술적 지배가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특히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분야에서-과 아울러, 미국이 유럽국가나 일본에 대한 생산성의 우위를 고수 내지 확대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p43

미국 패권이 한 세대 이상 지속하리라는 그의 예측은 사실상 틀렸다.

앞으로 얼마간-한 세대 이상-미국의 세계 일등적 지위는 어떤 단일 도전자에게도 위협받지는 않을 것이다. p250

우크라이나를 NATO나 EU에 포섭하더라도 러시아가 용인하리라는, NATO와 EU의 동쪽으로의 확장과 러시아의 서구화가 양립 가능하다는 판단과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

확장하는 유럽과 러시아의 관계가 공식적인 쌍무관계에서 더욱 유기적이고 결속력 있는 정치-경제-안보적 유대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21세기 초반의 20년 동안 러시아는 점차로 통합 유럽-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우랄산맥 너머로까지 확장되는-의 일부가 될 수 있다. p164

중국이 서구화하는 것 외에 정치적 선택권이 없고, 미국에 도전할 강력한 패권국으로 등장하지는 못하리라는 예측도 틀렸다.

중국은 민주화와 개방으로 나가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그리고 최적의 상황을 가정한다고 할지라도, 2020년까지 중국이 주요한 영역들에서 경쟁력 있는 세계적 국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p214

반패권 동맹 형성을 강요할 정도로 미국이 멍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틀렸다.

몇몇 러시아의 지정학자는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적 지위에 대항할 일종의 역 동맹을 구상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란을 잇는 동맹은 미국이 중국과 이란을 동시에 적대시할 정도로 근시안적일 경우에만 발전 가능한 것이다. p156

근본적으로 이 책은 미국이 두는 체스를 방해할 잠재적 국가로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 중국의 부상은 아예 예측조차 못했다. 그리고 이 또한 대단히 낙관적인 예상에 기반한다. 미국 패권을 위협할 도전자가 최소한 한 세대 동안 나타나지 않고, 러시아도 잘 구슬리면 서구국가로 편입시킬 수 있고, 중국도 적당히 관리할 수 있는 고만고만한 나라에서 성장을 멈출 것이라는 예상, 따라서 미국이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유라시아 대륙을 분열된, 미국에 협력적인 몇 개의 블록으로 관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궁극적으로 이들의 협력을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책임은 덜고, 힘은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너무나 낙관적이다.

이런 낙관성은 책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런 낙관적 예상의 근원은 오만함이다. 오만함은 객관적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최악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을 방해한다. 압도적 규모의 유라시아의 주요 국가를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체스판의 말처럼 생각한 것 자체가 오만이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과거 소련연방이었던 나라를 서구로 편입하고,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러시아를 좌절시키더라도 러시아가 서구와 미국에 친화적인, 더 나쁘게는 길든 나라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은 타당한가? 한국, 대만, 일본의 근대화와 경제 성장 속도를 볼 때, 중국의 성장이 어느 순간 멈추고 서구에 자본과 기술을 의존하는 열등한 국가로 남을 거란 확신은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 거대하고 역동적인 나라를 미국의 “닻” 역할을 맡는 온순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섣부르지 않은가?

조언에 기반이 되는 모든 예상과 판단이 어그러지면서 그가 했던 조언의 핵심은 적절성을 잃었다. 그래도 큰 그림에서 번뜩이는 통찰력은 보는 재미가 있다. 통합되어 힘을 되찾은 유럽과의 대등한 파트너십이 미국 패권에 필수적이라는 것, 주한미군의 철수는 중국의 세력확장과 일본의 독자노선과 군사적 재무장을 낳을 것이라고 본 점, ‘유라시아의 발칸’은 관리해야 하는 곳이지 직접 개입하는 곳이 아니라고 본 점, 등이다.

미국이 유라시아에 강력한 도전자가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사실상 반패권 동맹이 형성되는 것도 막지 못한 것이 브레진스키 때문은 아니다. 미국 힘의 기초인 경제력, 특히 산업생산력과 경쟁력이 사라지고, 정치는 파편화되고, 사회는 활력과 목적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달러를 마치 천연자원처럼 뽑아 쓰는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은 마약처럼 미국을 취약하고 타락하게 했다.

이런 모든 문제와 맞물려 브레진스키의 조언의 핵심인 “책략과 외교, 합종연횡과 포섭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자원을 매우 정교하게 배치하는 일”을 해내지 못했다. 미국의 이른바 ‘세계 일등 지위(global primacy)’는 매우 위험하다. 가장 결정적 위험은 곧 닥쳐온다. 바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다. 트럼프는 단순히 ‘체스’를 엉성하게 두는 인물이 아니다. 지정학적 전략으로서 ‘체스판’을 뒤집어엎어 버릴 사람이다. 그 결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동맹과 연합의 정교한 체제에 의해 떠받쳐”지는 미국 패권은 단번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머지않아 미국은 유라시아의 교두보로서 유럽과 극동 동맹국의 신뢰를 모두 잃을 것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나중에 태어난 이유로 나에게 역사의 답안지를 맞춰볼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지성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 미국 중심의 오만함이 부른 부정확한 판단과 예측에 탄식하면서, 지금 미국의 현실과 비교하며 안타까워하면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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