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흡수하려는 움직임은 이제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미국 상원에서 스테이블코인 법안(GENIUS Act)이 통과됐다. 스테이블코인이 미국 국채 수요를 흡수할 것이라는 기대는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다. 즉, 스테이블코인이 대량의 미국 국채를 준비자산으로 삼는다면, 점점 신뢰를 잃고 외면받는 미국 국채가 새로운 수요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달러 패권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을 것이다. 내가 5년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대부분이 ‘설마’ 했던 일이다.
- 하지만 미국의 더 중요한 속셈은 따로 있다. 달러 수요를 외국의 말단 개인까지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즉, 외국의 개인들이 자국 통화가 아니라 달러로 거래할 수 있도록 촉진하겠다는 말이다. 만약 당신이 서울에서 USDC나 테더로 설렁탕 값을 지불할 수 있다면, 원화는 어떻게 되겠는가? 약소국 통화는 통화 주권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간편하게 전자적 방식으로 소액 결제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지독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와 같은 제3세계 국민들은 어떤 돈으로 가치를 저장하고 거래하고 싶어 하겠는가? 이런 나라들의 자국 통화는 거의 가치를 유지할 수도 없고, 국가는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펼 수도 없다. 암호화폐의 대중화가 스테이블코인의 상용화에서 시작되고, 그 결과 약소국 통화 주권이 훼손된다는 이야기는 내가 5년 전부터 끊임없이 해왔던 것이다. 이는 쉽게 말해서 미국의 달러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통화 전쟁이다.
- 각국의 1차적인 대응은 스테이블코인을 불법화하거나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적 방식으로 거래되는 스테이블코인은 국가의 검열이나 금지에 저항성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금지하려는 국가는 부의 거대한 유출을 경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나마 규모가 있는 나라가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뻔하다. 단순히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해서 대응할 수 있는 국가는 아마 유로화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엔화, 파운드화, 스위스 프랑, 기타 준(準)기축통화 발행국과 중동이나 러시아와 같은 자원 부국은 미국 국채와 동등하거나 우월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준비자산으로 쌓고, 이를 자국 스테이블코인이나 화폐의 보증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 이런 준비자산으로 유력한 것은 금, 원유와 같은 자원, 미국이나 주요국 국채, 그리고 비트코인이다. 각국은 자국이 가진 것이나 확보할 수 있는 자산 바스켓으로 자국 통화의 가치를 뒷받침할 수밖에 없다. 이제 각국 정부가 자국 영토 내에서 자기가 발행한 명목화폐의 사용을 강제하는 일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한 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가 다양해지는, 이른바 ‘화폐의 시장화’가 일어날 것이다. 너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박상기가 '가상징표'를 금지하겠다고 나섰던 게 불과 7년 전 일이다. 앞으로 7년 뒤 화폐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 스테이블코인과 비트코인 같은 주요 암호화폐의 환전은 전자적으로 매우 신속하고 간편하게 이뤄질 것이다. 환전과 결제가 너무나도 신속하게 이뤄져서, 마치 ‘비트코인 → 스테이블코인 → 결제’가 지금의 카드 결제처럼 즉시 이뤄질 것이라는 점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비트코인은 이제 강력한 가치 저장 수단이자 결제 수단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비트코인이 스테이블코인을 매개로 즉시 사용되고, 국가에 의해 준비자산으로 비축될 것이라는 점이 의심된다면, 7년 전을 상기하길 바란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브레턴우즈 체제로 억지로 유지되다가, 명목화폐 제도로 누더기처럼 생명만 유지되던 현재의 화폐제도는 이제 죽어가고 있다.
- 이 모든 변화의 기저에는 달러 기반 명목화폐 체제를 유지해 오던 미국의 쇠락이 있다. 미국은 지금 세계 질서를 유지할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힘을 급속히 잃고 있다. 그 쇠퇴가 너무 빨라서 보는 나도 당황스러울 정도다. 아직 남아 있는 미국 주도 세계 질서의 엔진인 ‘달러 체제’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것이 지금의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다.
- 트럼프는 시대가 불러낸 인물이다. 미국이 어떤 가치를 수호하는 예외적인 국가가 아니라, 그저 자국 국민을 잘 살피는 강력한 국가이기만을 바라는 미국인의 공감대가 불러낸 인물이다. 따라서 이를 좋다, 나쁘다 말할 필요는 없다. 미국인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미국이 영역을 축소하고 급속히 물러나면서 발생하는 힘의 공백은 우리에게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미국이 영역을 자국 영토와 핵심 이익이 걸린 부분으로 축소하는 과정을 명민하고 세심하게 관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 미국이 역외에서 물러나고 영향력을 축소하려면, 미국의 우방인 유럽과 일본, 한국에 더 큰 발언권과 책임을 서서히 넘겨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주된 역할을 넘기고, 미국은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 역할에 전념하면서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정학과 국제 외교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은 여러 방면에서 확인된다. 이는 한국에게 더욱 위험한 신호다.
- 비트코인 이야기를 하다가 지정학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시작되는 지정학적 재편성 과정에서 가장 큰 도전을 받는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번영은 결국 미국 주도 세계 질서의 결과다. 좋든 싫든, 한국은 미국이 만든 세계 질서의 최대 수혜국이다. 그 질서가 사라지고, 응력이 쌓이고 있는 지정학적 판의 경계에서 한국은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트럼프가 하는 짓을 볼 때, 판의 경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빠를 것이다. 한국의 화폐는 그런 의미에서 안전하지 않다.
- 거품이 가득 낀 한국의 부동산, 원화로 평가되는 자산을 들고 미래를 계획하거나 부를 축적했다고 만족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금 실물, 암호화폐, 기타 원화로 평가되지 않는 자산으로 자산 분배를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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