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잔혹사 2편






화폐잔혹사 1편




이전 글에서 영란은행이 처음으로 국가의 채권을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의미를 간단하게 말하면 은행이 화폐제도를 독점하게 된 것이고 왕은 조세저항 없이 세금을 걷을 방법을 찾은 겁니다.
부르주아가 최종적으로 앙시앵 레짐을 끈낸 뒤에도 이런 유착관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근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더욱 더 심해졌죠. 정확히 말하면 이런 유착관계가 있었기에 근대국가가 나타났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왕이 채권만 발행하면 돈이 생기니 이 돈으로 상비군도 관료제도 유지할 수 있게되었죠. 상비군과 관료의 힘을 빌어 왕의 힘을 영토 곳곳에 침투시킬 수 있게 됩니다. 고립되어 있던 곳에 도로를 깔고 재판소를 세우고 귀중한 물자를 전매하고 더 촘촘하게 세금을 걷어갑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왕의 영토에 거주하던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던 사람들이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국민으로 바뀝니다. 드디어 근대적 민족주의가 탄생한 겁니다.
왕들이 예상 못한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의 최종 승자가 왕이 아니라 부르주아였다는 것입니다. 근대화 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왕은 타도되거나 상징으로만 남습니다. 돈을 쓰는 사람은 왕에서 정부로 바뀌었지만 돈을 만드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으니 은행이 진정한 승자인것 같습니다.




부르주아가 근대국가를 계승한 후에도 국가가 국채를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국채를 담보로 화폐를 찍어내는 시스템은 더욱 강화됩니다. 이런 시스템을 바탕으로 근대국가는 더욱 강력한 힘으로 영토와 영토내에 살고 있는 국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교육과정을 통일해 비슷한 생각을 모든 국민에게 주입할 수 있게 되었고, 상비군을 유지하는것을 넘어서 성인 남성을 아예 징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찰과 사법제도도 촘촘하게 만들어 권력에 비협조적인 사람을 위협하거나 투옥할 수도 있게 되었죠.
이 모든 과정은 권력자가 은행을 통해 돈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돈이 권력인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20세기 초까지도 화폐라는 것이 금과 은이라는 귀금속의 보관증이나 교환권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입니다.
영란은행같은 중앙은행이 국채를 담보로 은행권을 찍어 내더라도 은행권을 금으로 바꿔 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바꿔줘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권을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에 의지해서 신용화폐를 발행했지만 최소한 금이라는 한계를 의식하고 돈을 찍어내야 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도 금화와 은화가 화폐자격을 가지고 자유롭게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밥 사먹고 은화로 결제 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오히려 이런 돈은 국경을 넘어서도 쉽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보증할 제3자가 필요 없었으니까요.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정부와 은행 입장에서 참 불편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정부와 은행은 은행권을 통일하고 그 발행 권한을 정부와 중앙은행이 독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답이 나와 있는겁니다. 이제 화폐로써의 금과 은의 지위를 박탈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야 중앙은행권이 영토내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화폐가 되니까요.


이제 금과 은을 돈이아닌 귀금속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습니다.

화폐로써의 금의 시대가 끝난 시점을 대부분 1971년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을 거부한 시점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귀금속이 바로 화폐라는 관습은 인간의 본성처럼 강력한 것이라서 한번의 선언으로 그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은 길고 점진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근대국가 형성 이후 늘어난 통화량 만큼 지폐의 사용은 더 활발해 집니다. 비율로 따지면 시중에 돌아다니는 금과은은 점점 줄어들게 되죠. 이런 결과로 사람들은 점점 지폐를 자연스러운 돈으로 여기게 됩니다.



각국 정부가 화폐로써의 금과 은의 지위를 본격적으로 박탈하려고 한 것은 1차 세계대전때 입니다.
전쟁에 들어가는 막대한 전비를 지불하려면 돈을 찍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일시적으로라도 금태환을 중지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전쟁참가국은 모두 금태환을 중지하고 지폐를 마구 찍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국민이 보관하고 있는 금을 전쟁채권으로 바꾸라고 설득합니다.
영국은 양화를 유지해야 전쟁당사국이 아닌 나라들의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당장 국가간의 금태환을 중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전쟁채권 판매와 더불어 시중에 유통되는 금화를 걷어드리기 시작합니다. 국내에 유통되는 금화를 거둬들여 400 트로이온스짜리 골드바로 만들어 중앙은행에 보관했습니다.
실질적으로 개인 사이에 거래수단으로써의 금을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없에버린 것이죠. 개인들이 금을 보관하는 행위를 비애국적인 행위이며 확인될 경우 몰수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금 들으면 생소한 이야기입니다만 정부가 개인의 금보유를 불법화한 예는 이번 뿐만이 아닙니다. 1933년 루즈벨트대통령은 행정명령 6102호에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금을 재무부 산하 기관에 제출하지 않으면 기소하겠다고 미국 국민을 협박했습니다. 정부가 궁지에 몰리면 개인의 재산을 직접 몰수하는 짓도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1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화폐로써의 금은 은행금고 속에 존재하는 커다란 골드바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 국민의 호주머니에 있던 금은 이제 국민의 눈과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금은 국민의 돈에서 은행과 국가의 돈으로 바뀌게 됩니다
비교적 흔한 은은 1960년대 말까지 동전으로 유통되었습니다만 이것도 곧 모든 나라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제 금과 은은 개인이 거래할때 쓰는 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지폐와 구리와 니켈따위로 만든 동전이 시중에 유통되었습니다. 이렇게 권력과 은행은 금과 은을 일반 국민의 관심에서 떼어냈습니다. 이제 지폐를 가져와서 금으로 바꿔달라는 개인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두 알고 있는 일만 남았습니다. 정부는 이제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돈을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다음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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