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라는 자신들이 백서에 밝혔듯이 은행과 금융권을 뛰어넘어서 제삼 세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화폐가 되길 원합니다. 백서에서는 다른 암호화폐를 짐짓 나무라며 "기존 시스템의 파괴가 아닌 협력으로" 혁신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We believe that collaborating and innovating with the financial sector, including regulators and experts across a variety of industries, is the only way to ensure that a sustainable, secure and trusted framework underpins this new system.
그러나 리브라는 기존 금융계와 화폐시스템에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이 될 것입니다. 성공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 가치와 역할을 기존의 논리로 깎아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폐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가치의 보존과 가치의 교환입니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없고(제 생각에는 fiat money가 더 내재적 가치가 없지만) 실제 사용하기 불편하다(가치 교환이 힘들다.)는 논리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트코인을 돈이 아니라 부동산이나 그림 같은 일종의 독특한 "자산"으로 가치를 폄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끼리 ETF도 만들고 숏도치고 롱도치고 북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기존 금융권과 화폐시스템에 편입시킬 수 있다고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명목화폐로 가치를 보증한다는데 리브라를 어떻게 가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자기들 돈이 사실 가치가 없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이런 사업모델을 지금까지 기업들이 몰랐을까요? 몰라서 개처럼 열심히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면서도 불합리한 금융과 화폐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었을까요?
같은 미국의 거대 기업이라도 GM과 Facebook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전자는 전통적인 제조업으로 어느 정도 국가의 지원과 비호를 받습니다. GM이 가진 기술력과 자원은 모두 미국이 가진 힘이 됩니다. 즉 지금까지의 초거대 기업은 국가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종속, 공생하는 관계였습니다. 그 때문에 9.11사태가 일으킨 경제공황으로 GM이 망할 것 같았을 때 미국 정부가 죽기 살기로 이를 막았던 것입니다.
Facebook은 전통적인 제조업과 다른 방식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냅니다. 그 때문에 국가에 종속되는 경향이 훨씬 덜합니다. Facebook이 갖는 정보는 엄청난 가치가 있지만, 이것을 통제하고 사용하는 데에 국가보다 기업에 훨씬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8~90년대에 경영학자들이 유행처럼 쓰기 시작했던 진정한 의미의 "다국적 기업, 혹은 초국적 기업"은 비교적 최근에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Facebook, Google, Twitter, Netflix 같은 기업들은 부를 얻는 방식이 기존과 완전히 다른 진정한 의미의 다국적 기업입니다.
이들이 힘이 생기면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나카모토 사토시가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부를 만들어 내는 기업과 개인이 왜 저렇게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화폐시스템에 의존해야 하는가……. 가치의 저장도 제대로 안 되고, 주기적으로 금융위기를 만들어서 멀쩡한 기업과 개인을 결딴내고, 태생적으로 빈부격차를 만들어 내며, 사실상 인간이 통제할 수도 없는 화폐시스템에 왜 의지해야 하는가…….
서비스와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 기업의 장기인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상품으로써의 화폐, 혹은 화폐 서비스를 만들어 내면 안 될까?
이런 시도를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기업은 누가 봐도 Facebook입니다. 부의 원천이 국가의 비호와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생산시설이 아니라 전 세계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생긴 네트워크와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또 다른 암호화폐를 만들겠다고 시도하고 있는 기업도 텔레그램입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 기반의 카카오와 라인이 암호화폐를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정통으로 기존 시스템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 Facebook이니 앞으로 눈치만 보던 많은 기업이 비슷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여러 명목화폐를 묶어 가치를 보장하고 우선 송금과 가치저장의 편리성으로 기존의 명목화폐를 야금야금 쫓아내다가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발행하는 명목화폐와 같은 권리를 획득하는 게 목표겠죠.
이렇게 되면 국가가 찍어내는 화폐는 함부로 찍어내서 가치를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화폐라는 상품시장에서 그런 화폐는 외면받을 테니까요.
즉 화폐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상품이 되는 것입니다. 가치를 누가 더 잘 보존하느냐…. 어떤 것이 더 사용이 편리하냐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다수의 화폐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화폐들이 경쟁한다는 생각이 너무 터무니 없다고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모든 화폐가 가치저장수단으로써는 항상 시장에서 경쟁 중이었습니다. 원화 가치가 하락할 것 같으니 강남 부자들이 원화를 엔화나 달러화, 금으로 바꿔놓는다고 하는 게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가게에서 엔화나 달러로 결제하는 것은 좀 이상하죠.
이제는 가치 교환수단으로써의 화폐도 시장에서 경쟁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가게에서 다양한 수단으로 결제할 수 있듯이 다양한 화폐로 결제가 가능해지리라는 것이죠.
한 국가 내에서 가치저장과 교환의 역할을 하는 화폐가 다수가 되는 것…. 이것이 암호화폐 지지자가 바라는 미래일 겁니다.
우선 법정화폐라고 불리는 명목화폐를 시장에서 경쟁하도록 강요하는 역할은 비트코인보다 리브라 같이 기업이 만든 가치저장 암호화폐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가장 먼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사용할 수 있는 암호화폐는 비트코인보다는 리브라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트코인에 대한 각 정부의 첫 반응은 조롱과 무시였습니다. 한국도 가상징표에 투자하는 우매한 백성의 피해를 막는다는 식으로 접근을 했죠. 비트코인이 수천만 원이 되어도 이런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한적으로 조처하겠지만 지속적으로 무시할 겁니다.
리브라에 대한 각 국가와 금융권의 반응은 격렬한 분노발작과 증오일 겁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 너무 명백하므로 무시부터 하고 볼 시간이 없습니다. 시작부터 벌써 조짐이 보입니다만 이건 약과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리브라와 다른 회사가 발행하는 암호화폐(링크, 클레이튼)의 차이점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