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펑크의 명작 공각기동대는 이런 자막과 함께 시작됩니다.
기업의 네트가 별을 뒤덮고 전자와 빛이 우주를 흘러 다니지만,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지는 않은 가까운 미래
말 그대로 이 작품은 기업이 네트로 연결되어 별을 뒤덮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아직은 국가나 민족이 사라질 정도는 아닌 미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995년이면 인터넷의 파급력을 국가나 민족을 사라지게 할 잠재력이 있다고 느낄 정도의 시기도 아니었는데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이 작품은 넷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는 내용입니다. 앞으로 인터넷에서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네트로 연결되어 별을 뒤덮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는" 세상은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기업이 어떻게 국가와 대등한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세계적으로도 강력한 기업인 삼성 이재용 회장도 힘없이 구속되고 권력자 앞에 쩔쩔매는 모습이 일상적인 한국에서 기업이 국가와 동등한 권리와 힘을 갖게 되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지 모릅니다.
이전에는 기업이 돈이 너무 많아지면 그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어서 국가 같은 힘을 발휘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이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줬죠.
기업이 국가가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서 여러 사람에게 직접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인터넷)과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발권력)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제조건이 이제 조금씩 맞춰져 가고 있습니다.
만약 리브라가 성공하면 페이스북은 자기 일상사나 시시콜콜 늘어놓거나 가벼운 주제나 양산하는 SNS로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영토에 얽매이지 않은 기업 국가를 만든 곳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래 어느 순간에는 리브라를 가진 한국 사람은 리브라가 통용되는 어느 곳에서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은 리브라와 한국의 이중국적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감명 깊은 것은 이런 시도를 의도를 숨기고 구석에서 조금씩 힘을 기르는 방식이 아니라 선언문을 배포하고 동조자를 대놓고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벌써 리브라에 협력하려는 기업이 28개나 됩니다. 허접한 기업이 아니라 비자, 마스터카드, 우버 같은 초일류 기업들입니다.
리브라가 성공하면 리브라를 공용화폐로 쓰는 기업 국가집단에 가입하려는 기업이 더 늘어날 겁니다. 아니면 다른 제국을 꿈꾸는 기업기반 암호화폐가 속속 나오겠죠.
그래서 외국에서 환전하지 않고 돈을 쓸 수 있다는 것 빼면 기업이 돈을 발행하는 게 개인에게 무슨 혜택이 있을까요?
독일 헌법 1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라는 대한민국 헌법 1, 2조도 아름다운 선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일 헌법 1조가 국가의 역할과 본질에 대해 더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라는 집합적인 존재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라는 것이 어느 정도 집합적인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안정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국가는 "공익"이나 "갈등의 조정"을 내세워 점점 비대해 지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늘어나고 관료제는 점점 공고화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이 개인의 선택에 국가가 개입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은 점점 훼손되고 있습니다.
점점 개인이 질식되고 있습니다. 개인의 재산권을 먼저 약화한 다음 점점 다른 결정도 국가가 대신하려 하겠죠. 마치 슘페터가 말했던 사회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는 듯합니다.
뛰어나고 진보된 사회는 도덕적 당위론이 아니라 힘의 균형에 기반합니다. 국가만 한없이 강해지는 사회는 퇴보하는 곳입니다. 인간이 더 자유롭게 살며 진보된 문명을 이루려면 국가의 힘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수록 개인에 대한 통제력도 잃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더 자유로워집니다.
국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개인의 재산권을 세세히 감시하고 개입하는 곳에서 비트코인은 물론 어떤 암호화폐도 미래가 없습니다. 언제든 암호화폐를 불법화하거나 엄청난 세금으로 질식시킬 수 있습니다. 수십 가지 규제로 천천히 목을 조를 수도 있습니다.
암호화폐가 진정한 화폐가 되는 미래는 필연적으로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약화한다는 가정을 하는 것입니다. 박상기 같은 자들 한마디에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정렬하는 곳에서 비트코인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이것이 리브라로 대표되는 기업기반 암호화폐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자신의 관성에 의해 한없이 강해져서 개인을 질식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수단이 될 겁니다. 개인이 질식하지 않는 곳에서 리브라 이외에 암호화폐도 꽃을 피울 수 있을 겁니다.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화폐제도 아래서 진정한 인간 문명의 진보가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도 유수의 기업이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암호화폐가 있습니다. 링크와 클레이튼이죠. 이들이 리브라와 본질에서 다른 점은 비전의 크기와 개방성입니다.
이들은 전 세계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안정적인 화폐를 만들겠다는 거대한 비전은 없어 보입니다. 자신이 만든 플랫폼에 다양한 댑을 올려 생태계를 만들고 이를 천천히 확대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계획일 겁니다.
이런 계획은 국가의 화폐, 금융 제도와 경쟁한다기보다는 이오스, 이더리움, 다른 인터넷 기반 서비스들과 경쟁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기업들도 페이스북 같은 대담하고 넓은 시야를 갖는 암호화폐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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