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검은 우산 아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적과 친구,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한다. 입체적이고 복잡한 설명보다는 명료하게 구분되는 개념과 일관되고 깔끔한 설명을 좋아한다. 하지만 현실이 진짜 그럴까?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처럼 "진실은 순수했던 적이 드물고 단순했던 적은 없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 아닐까?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평가할 때, 입체적이고 다양한 면을 소개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왔던 기간이 있다. 바로 일제식민지시기이다.

이 시대는 고결한 민족의식을 가진 한민족이 악마같은 일제에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던 시기로 그려진다. 다른 해석은 물론 역사의 다양한 면을 들어내는것도 금기다. 이런 역사관은 진보적이라고 자신들을 평가하는 역사학계 주류 좌파국수주의(??)자들이 공들여 만들었고 우파인사들도 필요할때마다 곳감처럼 빼먹었다. 이런 분위기는 역사를 서술하는 모든 대중문화까지 파고들었다.

일본식민지시절에 대한 한국인의 내러티브는 선악이 구분되는 역사드라마와 닮아있다. 때문에 민비는 고결한 여걸로, 고종은 불운한 개명군주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는 제임스본드처럼 묘사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고 있으니 딱히 탓할 것도 없으리라..




힐디 강은 샌프란시스코 주변의 다양한 한인들을 인터뷰해 일제식민지 시기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얻어냈다. 현실과 진실이 그렇듯 이 시기에 대한 기억도 복잡하고 다양하다.




인터뷰 참가자들은 3.1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일본경찰과 헌병에 대한 공포,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혔던 폭력, 강제징용의 끔찍한 현실같은 부정적인 기억 뿐 아니라 일본의 근대적인 기술에 대한 찬탄, 새로 열린 기회를 쫒는 부산함, 자신을 공정하게 대해 준 일본인에 대한 고마움, 패전 후 힘들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에 대한 연민까지 다양한 경험을 쏟아냈다.

사회계층과 교육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하였지만 이 책의 내용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봤을 때 일제시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록,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더 뚜렷한 민족의식이 있었다. 
  • 전반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으나 아예 한국어를 못할 정도로 일본화 되었거나 차별없이 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 일본의 행정체재는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태평양전쟁 시작 이후로 일본의 통치가 더욱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했으나 행정-사법체제를 무너뜨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 근대적 질서에 빨리 적응할 수록 크게 성공했다. 교육과 사업기회는 생각보다 넓게 열려있어서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일본 만주 조선을 넘나들며 교육을 받거나 사업을 했다.




여러모로 1930년대 이후 일본식민지 시절은 1970년대 한국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지식인과 대학생의 독재에 대한 투쟁의 원천이자 신분상승의 수단이었던 고등교육기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체제와 활발한 경제활동의 기묘한 조화, 정치야 어떻던 자기삶을 꾸려나가야 했던 대다수 사람들의 부산함...

일제시대를 보다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다면 일독할만한 책이다. 사실 일제시대를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을 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사회의 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댓글

  1. 과연 한국인들이 이 금기를 넘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네요.
    10~20년 안에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고 반성하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안가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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