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2권의 내용을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국가가 자신의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할 때, 이익단체가 자신의 배타적 특권을 주장할 때, 사회에서 불운을 겪은 사람이 세상을 비난할 때 꼭 나오는 말이 ‘사회적 정의’이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럴 때 쓰이는 정의라는 단어는 자신의 특혜를 정당화하는 야비함과 불운의 책임을 인격화한 외부 사회제도로 돌리는 우둔함이 숨겨져 있다.
이런 속 보이는 용어가 왜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는가? 이는 장기간 인간의 진화에 관여해 온 부족주의적 가치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족사회에서는 소규모 조직의 이익을 위해 어떤 특정한 헌신을 요구하고, 조직을 위해서 낯선 사람을 해치는 것도 허용한다. 집단에 속해서 집단의 특수한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 인간은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런 집단적 가치관을 제공하는 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이다. 현대 열린 사회의 가장 강력하고 지저분한 적이다.
현대의 지적, 물질적 성장과 열린 사회의 등장은 이런 부족주의를 극복한 결과이다. 열린 사회는 개인을 특수한 목적에 복무시키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한다. 수동적으로 지켜야 할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규칙 아래에서 인간은 각자의 목적을 조화시키며 거대한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 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거대하고 번창하는 사회를 만들어낼 수단은 없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행동보다 돈을 벌 목적으로 재산을 털어 시장에서 생산될 물건의 생산비용을 낮추는 도구를 개발하는 게 사회에 훨씬 이득이 된다. 주변 공동체의 특별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보다 수많은 불특정 다수의 욕구를 채워주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게 사회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인간의 부족적 정의관이 뭐라고 하든 간에, 인간은 일반적 규칙을 지키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할 때 가장 타인을 돕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인간의 도덕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비직관적인 진실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통찰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족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얕은 사회적 정의에 대한 환상은 결국 전체주의적 사회를 불러올 뿐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가려운 곳을 긁는듯한 쾌감을 느꼈다. 어떤 해석이 옳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일을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뜻이다. 이런 해석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도 예측할 수 있고, 일어날 일은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정부의 촘촘해지는 법규명령에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여러 정치 논리와 정치인의 발언에서…. 나는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빤히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한다면 눈이 먼 사람이다. 개입주의적 국가와 증가하는 공무원, 위축되는 기업활동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할 거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눈이 먼 사람이다.
인간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이런 잠재력이 나타나려면 개인 선택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칙이 지켜져야 한다. 국가가 강력한 힘으로 어떤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 문명의 쇠퇴와 전체주의를 불러올 뿐이다.
수십 년 뒤에 인간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부족 주의의 변종을 극복하는 날이 온다면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같은 불멸의 고전이 될 것이다. 만약 부족주의가 승리하고 인간 사회의 암흑기가 도래한다면 이 책은 금서가 될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