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고찰한다. 대략적 내용은 이렇다.
민주주의는 절대적 권력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절대왕정과 맞서 싸우며 등장했다. 따라서 절대적 권력의 등장을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사고방식을 개발했다. 이런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과 선택의 공간을 보장받았고, 이는 극도로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민주주의는 서구에서 등장했지만, 그 성공의 결과 전 세계에 퍼졌다.
이후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운영과정에서 절대왕정보다 위험한 절대적 권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부의 권력, 특히 입법부의 권력은 처음의 의도와 달리 개인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문명을 퇴보시키고 있다.
현재 민주주의는 조직화한 이익단체의 압력 아래에 운영되며, 특정 개인과 단체에 혜택을 부여하기 위해 법의 이름을 뒤집어쓴 명령이 남발된다. 법은 더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입법부가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편익을 부여하는 명령으로 변질하였다. 정의라는 이름은 각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누추한 논리로 타락하였다. 이런 사회에서 진정한 정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성장을 이끈 자유도 질식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은 물론 개인의 생각도 바꿔야 한다. 우리가 정당하다고 느끼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 경제적 평등에 대한 열망이 사실 원시적 감정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이 무한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남에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좇는 개인이 진정으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통찰을 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문화와 관습의 산물이다. 그 역이 아니다. 이성으로 사회를 재구성하거나, 계획으로 어떤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참혹한 결과를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입법부는 이익단체에 압력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최소 3종류로 나눠야 한다. 개인이나 단체에 특권을 설정하는 명령이 아닌 진정한 법을 만들거나 개정하는 입법의회, 정부의 역할을 감시하는 정부 의회, 헌법의 개정 시기에 일시적으로 활동하는 헌법개정기구, 각 입법부나 행정부의 갈등에 대해 최종적인 사법판단을 하는 헌법재판소가 그것이다. 이렇게 분화된 권력기관에서 주권은 모두에게 있고 어디에도 없다.
정부는 이유 없이 독점하고 있는 사업에서 철수해야 한다. 특히 화폐 발행의 경우, 정부가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정치개혁이나 정부의 권한축소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가능하면 정부가 화폐의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은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2021년 여름, 하루하루 강해지며 개인의 행동을 지시하는 정부가 느껴진다. 이런 방향은 꾸준했지만, 신종코로나 이후에는 더욱 그 강도가 심해졌다. 이제 6시 이후 2명 이상 만나지 말라는 명령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릴 지경이다. 정부는 더욱 뻔뻔스러워지고 개인은 점점 소심하고 우둔해지고 있다. 이 모든 일 뒤에 강한 정부를 원하는 정치인, 조직화한 압력단체와 이들에 설득당한 개인들이 있다. 압력단체와 정치인은 그렇다 치고 개인들은 왜 이러는가?
이런 개인들은 자신의 불운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며 정부가 자신을 구해주기 바라는 사람일 수도 있고, 단순히 시기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 큰 정부에 드는 비용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혜택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겁한 사람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하이에크가 말하듯 긴 시간 ‘이성의 남용과 쇠퇴(Abuse and Decline of Reason)’를 겪으며 사람의 균형감각과 도덕성 또한 손상되고 쇠퇴했다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관습과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 이성 또한 이런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다. 즉, 우리가 오해하고 있듯 이성이 관습과 문화를 만든 게 아니다. 근대 이후 세계규모의 분업과 협력체계가 나타난 이유는 누구의 계획과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개인의 존재’를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 이성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체제에서 집단에 대한 원시사회에 계발된 본능인 충성심과 단결심, 형평성에 관한 관념은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맞는 새로운 도덕 관념은 아직 발전하지 않았다. 이게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유토피아를 선전하는 전체주의적 성격의 사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이전 원시사회의 도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서로 다른 시도일 뿐이다. 민족주의는 혈통에 따른 소속감에 호소하고, 사회주의는 이성적으로 유토피아적 원시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약을 팔고 있다. 불행히도 한국에 횡횡하는 전체주의 사상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이다. 근대 이후 어느 나라에도 나타나기 힘든 끔찍한 혼종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명확하다. 사실 눈만 똑바로 뜨면 볼 수 있다. 북한을 보면 된다. 그리고 점점 북한화 되는 중국을 보면 된다. 그곳에서 살고 싶은가? 자식을 기르고 싶은가?
하이에크는 지금보다 더 엄혹한 시절에 진정한 자유와 번영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했다. 이 책은 일종의 예언서이다. 너무 잘 맞는 예언서는 미래에 고전(古典)이 되거나 금서(禁書)가 된다. 이전에도 말했듯 이 책의 미래 운명은 인류가 번영하냐 쇠퇴하냐에 따라 이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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