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비평) 명(明)-청(淸) 교체기와 조선, 그리고 지금 동북아와 한반도

 

17세기 조선의 사대부가 있다. 이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질서는 중화(中華)의 화이관(華夷觀)이다. 중화의 질서란 명나라 천자를 주변을 책봉 받은 왕이 보좌하고 각 신분에 따라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이는 무력이 아니라 중화의 선진성에 바탕을 둔 유교적 질서, 특히 덕치(德治)에 기반한 것이다.

덕(德) 있는 천자를 구심점으로 미덕과 예절로 돌아가는 세상. 이것이 17세기 조선 사대부의 보편타당한 세계질서였다. 이를 중국에 굴종한 한심한 사대주의로 몰아가선 안 된다. 많은 사람의 착각과 달리 중국인과 한국인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정체성을 주입하는 것은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의 발명품이다. 즉, 한국인이 뿌리와 문화를 공유하는 어떤 공동체라는 감정은 우리 선조와 우리가 공유하는 감정이 아니다. 최근에 "발명"된 것이다. 당연히 17세기 사대부는 집 앞의 양인이나 노비보다 명나라의 선비와 동질감을 느꼈다. 

17세기 북경에 사행(使行)을 온 김육이라는 사대부가 쓴 글을 보자. 윤세형(2015), "17세기 초 사행록에 나타난 명나라 말기의 위기 상황-최현의 <朝天日錄>을 중심으로"의 번역을 옮겼다.

13성의 문인(文人), 재자(才子)가 구름같이 경사(京師)로 모였으니 성대했겠지요? 추로(鄒魯)의 지방에는 아직도 조두(俎豆)와 시서(詩書)의 가르침이 남아 있고, 염락(濂洛)의 사이에는 여전히 강습 토론하는 학풍이 존속되고, 산동(山東), 산서(山西) 에는 반드시 장상(將相)의 인재가 있을 것이고, 서촉(西蜀)과 동오(東吳)에는 진실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많을 것이며, 민광(閩廣)의 유자(儒者)는 능히 주장(朱張)의 학통을 계승할 것이고, 운귀(雲貴 운남(雲南)과 귀주(貴州) 지방)의 사람도 공맹(孔孟)의 도를 알 것인데, 한스럽게도 두루 숙소를 찾아다니며 손뼉을 쳐가며 담론을 벌여 예악을 묻고 시부(詩賦)를 논설(論說)하여 그 의문되는 것을 질정(質正)하고 새로운 것을 듣지 못했군요. 

북경까지 왔으나 병 때문에 명나라 사대부와의 교류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조선 사대부의 화이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부패와 사회상의 타락, 군사적 대비의 부족과 성리학의 퇴보는 16세기 말부터 이미 뚜렷했다. 명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군사적 약화는 17세기 초 명나라를 방문했던 사신들에게 충격을 줄 정도였다. 위의 김육이 명의 사대부와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논하고자 했던 1637년에 이르러서 명나라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1637년에 이미 조선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다. 조선 사대부의 사고를 끈질기게 지배했던 중화의 보편타당한 질서는 이미 현실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가 알듯, 조선은 급변하는 동북아에서 현실적 외교책을 펼치지 못하였다. 만주의 야인의 일파에 불과했던 건주여진이 만주를 석권하고, 몽골을 복속시키고, 명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내는 동안에도 조선 지도층의 외교는 비현실적인 면이 다분했다. 조선 사대부의 눈으로 보기에, 여진족은 일시적으로 위세를 얻더라도 이를 지속할 수 없었다. 화이관이라는 보편적 질서를 따르지 못하는 야만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정으로 나라를 유지할 힘이 없었던 것은 청이 아니라 명이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조선의 지도층이 현실주의적 외교책을 폈다면 청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당시 지도층이 비현실적 사고의 기반인 중화적 화이론이 외교에 당연히 필요한 현실인식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실을 존중하는 외교를 해 볼 기회도 없었다.


이제 불편하고 도전적인 질문을 하려고 한다. 지금 2022년은 명청교체기와 상황이 다른가? 누가 명나라이고 누가 청나라인지 다 이해할 것이다. 

내 생각에, 중국을 막을 수 있는 건 중국밖에 없다. 중국이 내부 문제로 자멸하지 않는 한 중국의 초강대국화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중국이 미국을 남중국해와 서태평양에서 밀어낼 것이고, 대만을 합병하는 것도 막지 못할 것이다. 사실 내 생각도 아니다. 미국이 대만을 방어할 능력이 의심된다는 정황은 미국이 직접 밝힌 것이다.

중국이 대만에 군사 행동하면.."워게임에선 미국이 자주 져"

美합참차장 워게임 쇼크 "대만해협서 中에 '앉은 오리'됐다"

미국의 군사력은 다른 나라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고, 미국의 동맹국의 군사력을 합치면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패권에 대한 도전은 불가능하다는 게 한국 사회의 통념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한 1990년 이후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는 추태에 가까웠다.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불린 이 과정에서 미국은 최소한 2조 6천억 달러를 지출했다. 한화로 약 3천조 원이다. 미국 인프라와 교육, 기술개발에 쓸 수도, 미군을 더욱 최첨단의 군대로 만들 수도 있었던 돈이다.

중국의 GDP는 대략 미국의 80%이다. 국방비는 대략 미국의 1/3이다. 이 말은 미국이 전 세계에 개입하고 중동에서 삽질하는데 엄청난 돈을 쓰는 동안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앞으로 중국이 본격적으로 미국과 군비경쟁을 시작하면 엄청난 돈을 쏟아부을 여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의 대미(美) 군사전략은 상당히 간단하다. 반접근/지역거부(Anti-access/Area Denial)다. 중국 해안에서 200해리(제1 도련선)와 남중국해에서는 반접근(Anti-access), 200~600해리(제2 도련선)에서는 지역거부(Area Denial)를 한다. 미군이 군사적 개입을 목적으로 서태평양의 제2 도련선에 접근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최대한 저지하되, 만약 이게 불가능하면 제1도련선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인적-물적 출혈을 강요하여 해당 공간에서 군사적 개입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의 대미 군사전략의 목표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군사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 미국이 군사-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분쟁 발생 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해·공군력의 원거리 기동 능력을 모든 힘을 다해 무력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만을 합병하거나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정치·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양적-질적으로 확충된 해군과 공군, 정밀한 유도무기, 유사시 미국 본토에 대량보복이 가능한 핵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이 이런 역량을 갖췄다는 게 공정한 평가이다. 

전쟁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전략과 목표는 합리적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말은 옳다거나 정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목적에 맞는 적절한 수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하겠다거나, 전 세계에 중국식 가치관을 가진 나라를 위해 개입하겠다거나, 세계 최강의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집 앞에서 적에게 최대한 아픈 일격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A2/AD 정책에 대한 미국의 대책은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 원래 계획은 공해전투(Air-Sea Battle)였다. 쉽게 말해 우월한 정보와 지휘통제 능력을 바탕으로 A2/AD를 수행하는 종심을 선제적이고 효율적으로 타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종심(미사일 기지, 공군기지, 해군기지, 지휘통제본부, 등)은 당연히 중국 본토 내에 있다. 결국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중국의 본토를 타격해야 한다는 말인데, 중국과의 확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냐는 비판을 꾸준히 받았다. 

지금은 ‘국제공역으로의 접근, 기동을 위한 합동개념’(JAM-GC: Joint Concept for Access and Maneuver in the Global Commons)이라는 길고 애매한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결국 중국과 전면전을 피하고자 종심 타격보다 기동을 통해 공역(즉,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영토와 영해 밖)에서 중국 공군과 해군을 요격하는데 중점을 준 것이다. 사실상 중국이 무서워 본토 공격은 가능하면 피하겠다는 내용이다. 서태평양에서 가뜩이나 군사적 열세에 몰리고 있는 것도 모자라 정치적 고려때문에 작전 수행에 제한을 둔 것이다. 미국이 동북아의 동맹국에게 확실한 군사적 지원을 할 것이라는 믿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중국은 소프트파워는 처참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미움받고 경멸받는 나라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중국이 우리가 믿는 보편적 가치관과 질서에 맞지 않는 '현상 전복 세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 자체가 풍기는 이미지가 매우 후지고, 몰상식하다. 중국인의 후진적인 행동이 이런 편견을 강화한다. 이 글은 중국을 사랑하라는 것도 아니고 중뽕에 관한 것도 아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고 한국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7세기 사대부와 지금 지성 있는 한국인은 달라야 한다. 1624년 사행(使行)했던 홍익환은 청나라를 이렇게 봤다.

“아! 저 오랑캐가 우주 가운데 무엇이기에, 중화(中華)를 어지럽히고 궁흉무도(窮凶無道)함이 이에 이르러, 드디어 유생으로 하여금 유리표박 하여 장해(瘴海) 가운데 외로운 섬에서 이 곤액을 받게 하는가? 저 푸른 하늘이 무슨 뜻으로 수백 년 전해 오는 의관문물(衣冠文物)을 오랑캐의 비린 티끌에 더럽혀지게 하면서 마침내 앙화를 그치게 하지 않는지 알지 못할 일이다."

인간의 지성과 덕성에 기초한 고상한 세계관의 신봉자였던 조선 사대부가 보는 여진족이, 지금 우리가 보는 중국보다 덜 경멸스러웠을까? 개인의 감정을 추스르고 현실을 보려면 조금은 냉정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미국과 서구가 말하는 보편적 가치관을 정의하기란 어렵다. 대체로 이런 특징이 있다. 인권, 개인의 자유, 법치, 합의에 기반한 세속적 정부이다. 현실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일군 가치이다. 그 성공의 비결은 이런 가치관이 인간 본성에 부합하거나, 모순이 없어서가 아니다. 시장원리와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보호를 받는 자유로운 개인은 시장원리를 원활하게 작동하게 하여 부와 혁신, 인류 도약의 원동력이 되었다. 서구에서 발전했지만, 이제 우리의 가치관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국인 중 누구라도 영장 없이 체포당하거나, 투표권을 빼앗기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보편적'이라고 받아들였다. 이제부터 위의 가치관을 보편적 가치관이라고 부르겠다.

현재 미국은 물론 서구사회 전체가 심각한 가치관의 변질과 타락을 겪고 있다. 그 나락의 시작은 미국이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이식하려고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자유주의 패권이다. 

그 타락의 가장 심각한 증상은 현실 인식능력의 부족이다. 미국과 서구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각색된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주입하면 세계가 평화롭고 조화롭게 될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현대판 화이론이다. 현실에서 통할 리 없다.

인권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잣대를 자의적으로 다른 나라를 비난하거나, 심지어 억압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하면 본말이 전도된다. 이렇게 되면 인권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편리하게 이용하는 도구가 된다. 오히려 가치로서의 본질을 훼손한다. 미국과 서방이 내세우는 인권은 사실상 말 안 듣는 나라에만 편리하게 적용되는 도구다. 미국도 2004~2013년 까지 파키스탄 한 곳에서만 표적 암살로 3,300명이나 살해했다(Douglas Jr. Lovelace, TERRORISM: COMMENTARY ON SECURITY DOCUMENTS VOLUME 137, Oxford press, 2014.). 테러 용의자 수천 명을 불법적으로 구금했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미 행정부가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다. 중동 왕정국가의 말도 안 되는 인권 상황은 입을 닫고 있으면서 이란의 인권에는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과 서구의 인권팔이는 도구적 수준을 넘어 인권이라는 용어를 말장난으로 만들고 있다.

자유는 서구에서 개인의 권리와 경제적 자유, 국가의 소극적 개입을 강조하는 일상적 자유주의(modus Vivendi liberalism)라는 본래 모습을 잃었다. 인간이 적극적인 사회공학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적 자유주의(progressive liberalism)로 변질된 자유라는 이념은 가난한 제3 세계 국가에게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탄소중립을 강요하고,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괴이한 망상을 강요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반지성주의, 정치적 올바름 이런 현상 모두 인간의 본성을 자기 생각대로 재구축 하겠다는 망상적 자유주의의 산물이다. 


모든 것 중 가장 위험한 문제는 위의 가치관 타락의 필연적인 결과로 서구,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 민주적 절차라는 게 저절로 잘 돌아가는 무한동력기관이 아니다. 구성원은 공화주의적 미덕과 책임감으로 제도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유지된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소수의 압력단체와 극단주의자에 휘둘리는 무책임한 중우정치로 변질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공화적 미덕과 공동체적 책임감이 없는 민주주의는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으로 가는 길이다. 탐욕과 이기심, 불신과 분열로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길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변질은 서구 정치권 전체에 만연해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지만 미국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치권은 장기적 안목으로 전략적을 추구할 어떤 합의나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다. 그때그때 압력단체에 뇌물을 주고, 유권자에 아부하며 자기 이익만 최대화할 뿐이다. 

국가를 변혁할 전략적 결정은 현 상황의 변화를 유발한다. 리더십과 결단으로 현 상황에 이해관계가 있는 이익단체와 반발을 무력화하고, 유권자와 국민에게 쓴 약을 삼키라고 압박해야 할 때도 있다. 타락한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이런 퇴보한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예가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이다. 이 방문의 목적은  민주당과 펠로시 본인의 정치적 관심끌기이다. 중간선거에서 패배가 확실한 민주당이 외부의 적을 보여주려는 시도이고 펠로시 본인의 정치적 신념을 선전할 기회이다. 하지만 일개 정당과 정치인이 쑈로 삼으려는 대상이 가장 적대적이고 강력한 국가의 "사활적 이익"이다. 멋있어 보이려고 배고픈 호랑이의 음식을 빼앗으려는 행동과 마찬가지다. 한다고 얻을 것은 없는데 잘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여기서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받는 건 경솔하게 행동한 정치인 개인이 아니라 미국 전체라는 점이다. 더 비극적인 면은 이런 정치 쇼에서 제일 큰 피해를 보는 건 대만과 대만인이라는 것이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중국을 약화하여 미국의 사활적 이익을 지키려는 장기적 청사진과 결단이 아니다. 개인의 조율되지 않는 일탈이다.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적과 충돌을 유발하는 위험을 공동체에 떠넘기고 자기의 정치적 추구하는 게 지금 미국 승계서열 2위의 하원의장의 수준이다. 문제는 이런 불장난에 대만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그 불똥이 한국으로도 튄다는 것이다. 낸시 팰로시라는 노인의 정치쇼에 한반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다. 

미국은 중국과 전면전을 벌일 각오로 대만에 개입할 용기가 없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을 얻기 위해 미국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싸우려 할 것이다. 단순히 중국이 더 전략적 행동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여기에 중국의 사활과 영토주권에 대한 자존심이 걸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만에 사활적 이익이 걸렸다고 보기보다(사실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다.) 위신이 걸렸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러니 낸시 펠로시가 저렇게 경솔하게 대만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가오를 지키려는 자와 생존권을 지키려는 자가 싸우면 누가 더 단호하고 비타협적일까?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다를까? 개인적 분노로 사우디 왕세자를 왕따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다 비굴하게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 증산을 구걸했다가 면전에서 거절당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대서양 방벽인 서방을 경제적 파멸로 끌고 가고 있는데 미국 정치권은 뚜렷한 해법이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다는 감정(가치관)이 현실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여든이 넘은 정치인들이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공화당이 집권하면 상황이 개선될까? 다음 유력한 대통령 후보는 트럼프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또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미국인의 감정은 이해하더라도, 트럼프의 외교는 재앙 그 자체이다. 트럼프가 자기 대통령 임기 때와 비슷한 외교 책을 쓴다면 미국은 영미권 동맹을 제외한 주요 동맹국 대부분을 잃는다. 한국을 대하는 트럼프의 무례하고 모욕적인 행동을 다시 보느니 차라리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중립 노선을 취하거나, 친중 국가가 되는 게 국가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마디로 중국이 내부 문제로 붕괴할 가능성보다 미국이 내부 문제로 쇠퇴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은 자신의 패권을 유지할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용기와 능력을 잃었다.


이제 결론을 내 보자.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의 대(對)중국-동북아 전략에 거리를 둬야 한다. 미국의 최고의 동북아 파트너는 일본이다. 일본과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야 한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게 사활적 이익이 아니다. 미국을 위해 중국과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최대한 두 강대국 사이에 끼는 것은 피해야 한다. 

대(對)북 정책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이전 정부가 과하게 북한에 저자세였다면, 이번 정부는 과하게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동조하고 있다. 동의 하지 않을 사람도 있지만 북한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당분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미국이 위협할수록 핵실험을 하고, ICBM을 쏠 것이다. 북한도 미국이 무서워서 저러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미친 개를 건드릴 이유가 있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둘째. 어떤 압박을 받더라도 독자적인 군사력을 건설해야 한다. 한미동맹의 집단안보 체제는 필요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하물며 앞으로는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이 개입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경솔한 행동이 촉발할 우발적인 전쟁에 한국이 말려들 상황이다. 독자적인 해군, 공군력뿐 아니라 독자적인 핵무장도 필요하다. 동북아 힘의 균형을 위해 미국과 한국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로 재편되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말(馬)이 되기에 너무 커 버렸다.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관인 민주주의, 인권, 자유는 이미 우리 것이다. 우리 사회가 힘든 일이 있어도 지켜야할 기준이다. 다만 이 가치관대로 세상이 움직여야 한다며, 그렇지 않은 나라를 오랑캐쯤으로 여겨 현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조선시대 사대부와 다를바 없다. 미국이 남용하는 "자유주의 패권"이나 미국 자체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다가는 우리가 쌓아온 모든 걸 재로 만들지도 모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