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비평) 소아과 의료 붕괴가 보여주는 것.

 


기원전 4세기의 일이다.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는 승기를 잃고 있었다. 시칠리아 출병이 처참한 실패로 국가 존립이 흔들릴 정도의 인적-물적 피해를 본 이후, 동맹은 등을 돌리고, 식민지는 반란을 일으켰으며, 스파르타는 기세가 올랐다. 페르시아도 노골적으로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사실 시칠리아 출병이 실패한 이후 주변 나라는 아테네가 일 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아테네는 부자가 망해도 3대가 간다는 속담처럼,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그 후 한참을 버텼다. 만약 이제 말하려 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아테네는 받아들일 만한 종전 협상을 끌어내고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실수란 아르기누사이 해전(Battle of Arginusae)의 어처구니없는 처리다. 

시칠리아에서의 패전 이후 아테네는 사실상 고립되었고 돈도 없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테네인들은 악착같이 남아있는 함대를 모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약속하고 선원을 충원했다. 사원의 금박을 벗겨내 재정을 충당하는 전례가 없는 비상 재정정책도 폈다. 그렇게 결사적으로 모든 역량을 짜내어 110여 척의 함대를 재건했다. 이게 아테네가 가진 전부였다. 사모스 동맹의 45척의 배를 더해 아르기누사이 해역에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연합함대와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아테네가 진다면 아테네의 패전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 경과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아테네가 독특한 전법으로 질적으로 우수한 스파르타-페르시아 연합함대를 격파했다. 앞에 말했듯 이 승리로 아테네는 수년을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의 전과를 파괴하지만 않았다면 불리하지 않게 종전을 끌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 아테네에서 벌어진 일은 중우정치가 벌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예의 하나이다. 짧게 말하지만 일단 초전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한 아테네 함대 지휘부는 중대한 후속조치를 결정해야 했다. 승전은 했지만 상당수 스파르타 함대는 탈출했다. 이 잔여 함대가 미틸레네에 있는 예비 스파르타 함대와 합류하면 즉시 90여 척이 넘는 함대를 재건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테네는 이 함대가 전부지만 스파르타는 유리한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 함대를 재건하고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그렇다면 패주 중인 잔여 스파르타 함대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 완전히 격멸하여 최소한 함대의 재건에 시간이 걸리게 하여야 한다. 군사적으로 전략적으로 완전히 타당한 결정이다. 

이에 따라 함대 지휘부는 1/3을 아테네 생존자 수색을 맡기고 나머지 함대로 패주 중인 스파르타 함대를 추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했던 당시 선원들은 간헐적 폭풍우 속에서 생존자를 구조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해 버렸다. 결국 1,000여 명의 생존자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아테네인들은 분노했다. 결국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의 혁혁한 전과를 묻혀졌고 당시 지휘부 8명 중 망명한 2명을 빼고 6명은 처형되었다. 아테네는 중요한 인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공공재를 파괴했다. 바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헌신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타당한 결정을 내려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에 관여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플라톤이 말했듯, 이 결정은 "감성적이고 무지한, 다수의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정치' 중우정치의 예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말도 안되는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하려다 실패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소아과 붕괴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뭔 알지 못하는 해전 이야기를 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두 사건은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대중이 국가와 사회의 유지에 필수적인 헌신과 책임감을 파괴했다는 관점에서 그 맥락이 같다. 

소아과 붕괴를 잘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뉴스는 소아과 수련 지원자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 이 원인을 다루지만 내 생각에 다 틀렸다. 아무리 비인기 학과라도 최소 1/3 정도는 지원자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아과는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감정적 만족감도 있으므로 언제나 마니아가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지원율이 작살난 것은 의대생과 인턴이 도저히 소아과에 지원은 못하겠다는 절망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절망감을 일으킨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아르기누사이 해전보다 설명하기 더 고통스럽다. 위 링크를 따라가 사실관계를 파악해 보길 바란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2020년 이후 소아과 지원율이 박살 났다. 인력이 없으니 가뜩이나 수련의와 교수까지 갈아넣어 억지로 운영하던 소아응급실은 하나씩 문을 닫았다. 

이대 목동병원에서 운영하던 신생아 중환자실은 일 년에 배드 하나당 일억 가까이 적자가 난다. 신생아 중환자실을 운영한다는 이유로 이대 목동병원은 일년에 수십억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모두 말도 안되는 의료수가와 건강보험의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다. 병원 입장에서는 없에버리는게 훨씬 나은 곳이다. 사회에 필수적으로 필요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곳에서 암 투병 중인 교수와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져도 깁스하고 진료를 보는 수련의, 전문적인 간호사들이 필사적으로 지켰다. 

이번 사태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던 소아과 교수 중 하나가 바로 암 투병 중에도 환자를 돌보던 그 교수다. 나는 당시 뉴스에서 분명히 들었다. 시위대 중 한 명이 그 교수에게 "이 살인자야"라고 고함치는 모습을 말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냐고? 1, 2심과 상고심 모두 무죄다. 재판과 상관없는 역학적 사실관계를 보면 원내감염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이는 유력한 간호사가 특정되었다. 이 간호사는 기소는 커녕 수사도 안 받은 것으로 안다. 사실 원내감염에 의한 사망은 일일이 확인되지 않을 뿐 상당히 흔한 일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상당수도 늙어서 죽을 때 원내감염에 의한 폐합병증으로 사망할 것이다. 사망 직전에 면역력은 극도로 떨어졌을 것이고 호흡기 문제를 일으키는 감염은 어떤 경로를 통하더라도 병원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타당할 정도로 오래 살았다면 그래도 천수를 누렸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게 싫으면 의학적 조력 없이 집에서 죽으면 된다. 

사실 바보가 아니라면 무리한 기소였다는걸 알 수 있었다. 아직 제대로된 확정적 증거도 없는데 가능성만으로 기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검사가 바보도 아닌데 왜 그렇게 무리를 했겠는가? 이른바 국민 감정법이라는 한국 특유의 비겁한 문화 때문이다. 아이들이 갑자기 죽었으니 누군가 비난할 사람을 찾았고, 담당 교수를 언론이 특정하자 모두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 돌을 던졌다. 사망한 신생아의 부모들은 갑자기 피해자가 되어 담당 의사를 비난했다. 

죄송하지만 피해자는 가해자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비극적 사건에 항상 피해자가 존재할 수는 없다. 누가 가해자인가? 일 년에 수십억씩 적자를 보며 신생아 중환자실을 운영한 이대 목동병원인가? 암 투병 중에도 아이를 돌보던 교수인가? 인력이 부족해 팔이 부러져도 계속 근무할 수밖에 없던 수련의인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밤을 지세우며 아이를 돌보던 간호사들인가? 이들은 나오자마자 생명이 위독해 중환자실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신생아들을 돌본 죄밖에 없다. 그 신생아들은 위의 의료서비스가 없었다면 중환자실이 아니라 태어나서 며칠 내에 사망했을 것이다. 원내감염에 대한 책임은 병원에게 민사소송으로 물을 수 있었다. 의료진의 과실이 있다면 그에 대한 민사책임도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기누사이 해전과 이대 목동병원 소아 중환자실 사건과의 차이도 있다. 우둔한 민중이 책임을 떠넘겼던 인물로 보자면 후자쪽이 훨씬 고결하고 이타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지금 소아과 사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에 대해 원죄가 있는 언론들은 애써 외면하는 사실이다. 단순히 소아과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의사가 생명과 직결되지만 부득이하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는 모든 진료에 종사하는 게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인지 보게 되었다.

이제부터 소아과가 어떻게 돌아갈지 이야기해 보겠다. 

우선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동네 소아과가 크게 줄어든다. 이미 동네 소아과는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워낙 수가가 낮기도 하지만 한국 특유의 진상 같은 기질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이미 언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소아과 전문의들은 성인을 진료하는 일반 의원으로 바뀌고 있다.

2, 3차 진료를 담당하는 병원에서 소아 입원실이 점점 문을 닫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형 병원도 소아 입원실을 폐쇄하거나 야간 응급 환자를 전원하고 있다. 앞으로 이게 점점 심해질 것이다. 물론 소아과 외래야 최대한 유지하겠지만 수련의가 없고 교수가 은퇴할수록 소아과 진료 자체가 축소된다.

제일 중요한 소아 중환자실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곳은 서울의 초대형 병원 몇몇밖에 없다. 이런 곳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교수와 수련의가 유지해왔다. 이제 수련의가 없고, 교수가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은퇴하면 소아 중환자실의 규모를 줄이거나 폐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집중 치료가 필요한 신생아는 어떻게 되냐고? 서울에 살고 운이 좋아 입원할 수 있으면 살고 아니면 원래 운명대로 죽는다. 아마 숙련된 소아과 의료진이 있었으면 자신의 아이가 살 수 있었단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소아과의 위기는 언론과 사회의 눈에 띄었다. 그러나 다른 핵심 의료의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 당신이 심근경색이나 뇌졸중, 심각한 외상, 등으로 신속히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에 접근해야 할 때, 더 이상 그런 기술을 가진 의료진이 부족하다. 서울 근교에 살면 그나마 살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지방이나 소도시는 더 심하다. 앞으로 교육과 삶의 질 뿐만 아니라 응급 의료의 접근성도 서울과 그 근교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왜 이런 사단이 일어났는지 궁금한가? 한국인이 국뽕 소재로 많이 사용하는 한국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 문제 때문이다. 

건강 보험금은 최대한 높이지 않고 의료 서비스를 싸게 공급하기 위해 모든 의사를 건강보험공단과 강제로 계약하게 한 제도가 있다. 바로 '당연지정제'다. 그다음 의료 수가를 자기 맘대로 정한다. 그 수가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따라서 보험 진료의 질은 구조적으로 높을 수 없다.

정말 부족한 건강보험 재정을 인기영합주의에 따라 마구 쓰고 있다.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인 한의학 치료에 엄청난 재정을 쏟아붓고, 간단한 기계-전산적 절차로 대체할 수 있는 약 조제에도 엄청난 돈을 넘겨준다. 모두 쓸모없거나 심지어 해롭지만 강력한 압력 단체인 한의사와 약사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다. 

그다음 시급한 의료 서비스가 필요 없지만 숫자가 많은 일반 국민들에게 뇌물을 준다. 병원을 쇼핑하고 다닐 정도로 낮은 진료비로 감기 치료는 쉽게 받을 수 있게 해 놨다. 심지어 입원했을 때 밥값도 보조해 준다. 

건강보험 재정을 집행하는 건강보험공단의 직원은 13,000명이 넘는다. 거기다 의료 행위를 심사-평가한다는 명목의 심사평가원 직원도 3,600명이 넘는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직무까지 합치면 단순히 건강보험 재정을 취급 집행하는데 2만 명 수준의 인력이 매달려 있다. 이들은 철밥통인 것은 물론이고 고위직으로 갈수록 정치적으로 나눠 먹을 수 있는 자리로 취급된다.

자. 이렇게 건강보험 재정 대부분은 위급하거나 심각한 의료 재난을 입은 국민을 구조하는 데 사용되지 못한다. 불필요한 공무원의 철밥통에, 정치인의 낙하산 자리에, 쓸모없는 유사 의료인 압력 단체의 뇌물에, 일반 국민을 위한 포퓰리즘에 사용되고 남은 게 그나마 그런데 사용된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나마 몸으로 막고 있었던 게 핵심 의료를 담당하고 있던 의사들이다. 언론과 국민은 그런 의사 중 가장 어렵고, 힘들고, 이타적인 역할을 하던 의료진을 투옥하고 괴롭혔다. 

위 견해가 자신과 달라 불편한가? 그래서 다른 논점으로 뭔가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른 소리를 하기 전에 이 말에 대답해보라. 당신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다음, 평균적 회사원의 수배에서 수십 배의 소득을 얻을 기회를 양보하고, 2-3일에 한 번씩 밤을 세워 가며, 환자의 원망과 소송 위협을 감수하고 소아 중환자실, 중증 외상 치료실, 기타 중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을 수 있는가? 

'이대 목동병원 소아 중환자실 사건'은 위의 악조건에 '민심에 의거한 투옥과 형사처벌 가능성'을 보태준 것이다. 난 5년 전에 위 사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무려 5년이다. 무죄가 확정될 때 까지 구속 기간 1년을 포함해 무려 5년이나 담당 의료진은 재판에 끌려 다녔다. 당신이면 소아 중증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은 핵심 의료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한국의 핵심 의료 서비스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이게 위 모든 사건의 본질이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위의 문제를 반대로 하면 된다. 쓸모없거나 해로운 한의학과 투약에 들어가는 자원은 막고, 국민 다수에게 뇌물처럼 뿌려지는 저가 의료비는 높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집행하는 기관은 전산화-자동화하여 소규모로 만들고, 정말 의료 재난을 입은 국민이 확실하게 치료받을 수 있게 상식적으로 의료진을 대우해야 한다. 켜켜이 쌓여있는 똥밭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큰 단점이 무지하고 감정적이고 이기적이고 목소리 높은 사람이 더 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는 것이다. 아르기누사이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를 좌절하게 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다.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위 사건은 워낙 뚜렷하고 극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사건의 발생과 그 결과를 그나마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언론과 눈 먼 대중이 무너지려는 댐을 온몸으로 막고 있던 사람에게 돌을 던졌다. 그 결과 댐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비슷하게 치명적인 일도 많을 거란 걸 모두 느낄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그 사회에 대한 헌신과 신뢰가 필요하다. 돈으로 환산하거나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이게 있다는 걸 모두들 잘 안다. 이게 파괴되면 사회는 즉사하지는 않더라도 중증 질환자처럼 천천히 파괴된다.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가 어떻게 건강을 회복할지 충분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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