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근로 시간 변경 제도가 장안의 화제다. 근로 시간 산정 기간을 변경하여 최대 주에 69시간까지 유연하게 일하게 하겠다는 내용이다. '근로 시간을 유연하게' 하려는 것이 정책의 목적인데 이는 직관적으로 타당하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의하고 노동시간과 강도가 사회 통념과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국가가 둘 사이의 사적 계약에 개입하여 주 단위로 노동시간을 과도하게 제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국민에게 뇌물을 주고 유권자를 매수하려는 정책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할만 하다.
그러나 일반인이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최대 주 69시간 근무 가능"이다. 마치 경제적 보상이 없는 야근을 69시간까지 합법화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열악한 기업일수록 노동법상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될지 모르는데 그나마 있던 52시간 근무를 없애는 것은 사측의 입장이 과도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내가 볼 때, 이 근로 시간 변경 제도의 문제점은 사측-노동자 측 누구에게 유리한가가 아니다.
우선 위 개선안은 5년 전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나는 이를 비판한 글을 5년 전에 쓴 바 있다.
5년 전 문재인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의 문제점은 국가가 사용자-노동자의 사적 계약에 무리하게 개입하여 당사자의 합의에 의한 유연한 노동 형태의 불법화 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을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위의 개정안이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이 개정안은 개악이며, 실제로 노동자 측에 불리하게 악용될 위험성이 크다. 우선 아래의 표를 보자. 표의 출처는 동아일보다.
위 표가 이해가 가는가? 표를 보자 마자 "내가 왜 저런 걸 이해해야 하는가?"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근로시간저축계좌제는 뭐고, 선택과 탄력 근로제의 근본적 차이는 뭔가? 근로시간 산정 기준은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건가? 저 규칙이 제대로 지켜질지 누가, 어떻게 감시할 건가? 한마디로 누더기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문제점을 고치겠다고 제도를 더 누더기로 만들어 놨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주 52시간 근무제의 문제점을 다시 말하자면 "국가가 사용자-노동자의 사적 계약에 무리하게 개입하여 당사자의 합의에 의한 유연한 노동 형태를 불법으로 만든 것"이다.
어떤 회사의 주 근무시간이 40시간이라고 하자. 회사가 너무 바빠 이번 주에는 주 53시간을 일하고 그 대신 다음 주는 아예 쉬는 걸로 노사가 합의했다고 하자. 기존 제도로 이는 불법이다. 노동자 입장에서 무려 노동 시간이 27시간이나 줄어들고 사측도 불만이 전혀 없다고 해도 말이다. 서로 이득이 되는 사적 계약에 국가가 무리하게 개입하여 발생할 수 있는 이런 삽질을 무슨 말로 정당화할 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간단하다. 당사자 간 노동 시간 합의가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거나 사회 상규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 40시간 이상의 노동 시간은 잔업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수당에 상당한 할증을 법적으로 보장하되 잔업 시간의 한도는 상식에 맞추는 것이다. 69시간이라도 좋고 70시간이라도 좋다. 얼핏 들으면 위의 개정안과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아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위 윤석열 정부의 개정안은 정부가 "사적 계약에 무리하게 개입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더 엄청나게 세세하고 무리하게 개입한 것이다.
위 암호문 같은 규정은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다. 탄력근로제와 선택근로제, 근로시간저축계좌제가 잘 지켜지는지 어떻게 감독할 것인가? 노무사도 햇갈릴만한 저 규칙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절차가 필요할까? 이를 위해 낭비되는 행정력은 어떻게 할 건가? 무리한 국가의 개입을 되돌리기 위해 국가가 더 개입하는 꼴이다. 결과는 비극적이겠지만 하는 짓은 희극에 가깝다.
만약 노동 잔업시간을 당사자 사이의 합의에 따르되 40시간(예를 들면) 이상은 잔업으로 보아 수당의 할증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여기에서 쟁점은 하나뿐이다. "초과 근무 시간의 할증을 얼마로 할 것인가?"이다. 이는 여러 쟁점이 겹쳐 아예 뭘 합의해야 할지도 모르는 많은 정치 쟁점에 비해 선녀나 마찬가지다. 대략 1.5~2배 정도면 상식과 통념에 맞지 않을까 싶다. 아마 노사 사이의 합의도 이쯤에서 이뤄질 것이다. 정부가 감독할 것도 엄청나게 간단하다. "잔업 수당을 정확하게 지불했고, 노동자의 건강상 정해진 주 최대 근무시간을 지켰냐"는 것이다. 이는 행정적 지도와 간섭이 불필요하다. 최소한의 규정을 어긴 불법 행위에 대한 탐지나 신고를 바탕으로 사법기관이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제 두 해결책의 차이점이 이해될 것이다. 하나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제거한 것이고, 하나는 이전 정부의 잘못된 개입을 바로잡기 위해 더 꼼꼼하고 복잡한 규칙으로 개입한 것이다.
혹시 어떤 경우라도 주 52시간 이상 일하는 것을 불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외국은 어떻게 하고, 한국 사회가 어쩌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강제로 "인간적 생활"을 보장한다고 느껴지는 특정 시간 이상으로 강제로라도 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 경험으로 그런 사람은 무능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다른 사람을 규칙으로 얽매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는 부도덕한 사람이다. 이런 자들은 단순히 최대 노동 가능 시간을 낮게 정할 뿐 아니라, 최저임금도 높이 올리고, 실업과 노후에 대한 보장책을 넉넉히 마련하는 것 모두를 법적으로 엄격히 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라 확신한다. 한마디로 일은 적게 하고, 내 능력과 상관 없이 최저임금은 높아야 하며, 실업이나 노후도 정부나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와 정부에게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거나, 국가와 사회가 자기를 보살피는 부모라고 느끼는 정신적 어린애다.
애초에 사회와 기업에 필요한 사람(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 아니다)을 요즘 같은 시기에 최저임금만 줄리 없다. 자신 인생을 주도할 최소한의 가오가 있다면 자신의 노동 조건을 유연하게 할 협상을 꺼릴 이유가 없다. 실업과 노후에 대한 대비도 사회가 보장하는 최소한 이상으로 주체적으로 해 나갈 것이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나 해 보자. 애초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낮은 노동 생산성을 노동의 양으로 벌충하며 성장한 나라다. 이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바람직하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평등한 면은 약자만 죽어라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판사는 서구 국가의 3-4배 많은 사건을 처리한다. 검사는 4-5배 많은 사건을 기소한다. 의사는 5-6배 많은 환자를 본다. 공무원 노동의 질과 강도가 높은 것은 유명한 사실이고 고위직으로 갈수록 공직자(선출직 말고)의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기업 영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나마 한국의 고부가가치 산업을 이끈 핵심적 인재들이 주 52시간 따위를 신경 쓸 것이라 생각하는가? 한마디로 사회 인프라를 움직이고 기업 생산성을 책임지는 핵심 인재들은 한국 사회를 서구 어떤 나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비용과 높은 효율로 운영한다.
만약 기계적으로 주 52시간(삶의 질을 내세우는 인간이 주장하는 다른 시간이라도 상관없다) 이상의 노동을 엄격한 처벌로 불법화한다면 한국 사회의 기초적 사회 서비스는 모두 마비된다. 의료-법률-행정-기업 발전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면 왜 한국 사회가 지난 정권 동안 마비되지 않았나? 핵심 분야의 인재들이 제대로 돈도 받지 않고 몰래 일한 덕분이다. 판사가, 검사가, 임명직 공직자가, 의사가, 기타 사회 인프라를 운영하는 인사들이 일주일에 52시간 이상 일하지 않고 퇴근했다면 국민은 사법 서비스도, 의료 서비스도, 기초적 행정 서비스도 적절히 받지 못하는 실패 국가가 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게 바람직하다는 게 아니다. 개선해야 할 질병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질병은 법과 규칙으로 치료할 수 없다.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 그 약은 본질적으로 기업과 공무원조직의 혁신과 효율화다. 이런 면에서 노동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고용조건도 자율화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사적자치에 기반한 계약에 국가가 무리하게 개입하는 것은 영원히 한국을 노동생산성이 낮아 죽어라 일해야 하는 사회로 만드는 길이다.
듣기 싫은 이야기 하나 더 해보자. 당신이 받는 급여는 천부인권마냥 당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다. 사적 자치에 입각한 고용주와의 계약의 결과다. 계약은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당사자 사이의 합의다. 회사가 당신을 고용한 이유는 당신의 급여 이상으로 회사가 이득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계약은 수없이 변경되고 심지어 파기되기도 한다. 그 계약의 조건에는 주간 노동시간도 포함된다. 당신이 그 계약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변경을 요구하거나 갱신하지 않으면 된다. 이게 자본주의의 정수(精髓)이자 현대사회가 누리는 번영의 원천이다.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더 취약하기 때문에 보호가 필요하다 진부한 소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장담하건대 자신이 고용주에게 크게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거나, 자기 손으로 김밥 한 줄 말아서 팔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인적 자원은 모든 조직이 최소한 유지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생각보다 피고용자는 고용주에 비해 을이 아니다. 혹시 자신에 맞는 양질에 일자리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고용주 입장에서 양질의 피고용자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자기 객관화는 힘들고 고통스럽다. 때문에 정부는 물론 언론에서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모와 친구도 당신에게 편향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일수 없다.
인간은 어느 정도 균질한 능력과 자질을 갖고 있지 않다. 단순히 지능이 높고 창조적인 사람이 드물다는 게 아니다. 비교적 단순한 일이라도 성실하고, 꾸준하게 일할 사람도 충분하지 않다. 이런 인물을 시장에서의 대우 이하로 대우하는 회사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도구는 노동시장에서 당신의 위치다.
경제 사정이나 제도에 의해 고용시장이 너무 위축된 경우 이 도구가 더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다. 반대로 경기가 좋다면 이 도구는 더 부드럽게 적용될 것이다.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잣대를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유도할 수는 있다. 시장에 정부가 세세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고용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번거롭고, 위험해진다면, 즉 고용비용을 강제로 올린다면 가장 영세한 고용주부터 고용을 포기하거나 연기한다. 가장 취약한 피고용인을 고용하는 고용주다. 따라서 그 고통은 사회의 가장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을 높게 책정하고, 급여 외에 준조세를 포함하여 강제하고, 사측의 노동계약 해지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노동시간과 같은 노동조건에 세세하고 복잡한 규정과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이다.
이런 사회적 흐름의 가장 잔혹한 결과는 사회의 번영을 막고 경제적 약자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한국인을 부모에 매달리는 취약한 아이로 만든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 계약을 자신의 조건으로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정치산자나 금치산자, 미성년자와 처럼 말이다. 노동조건에 관하여 모든 국민은 지금 이들과 다를바 없다. 계속 이런 대우를 받으면 한국인은 모든 일을 정부와 사회가 해결해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JMS나 아가동산의 신자를 함부로 비웃지 마라. 이들은 재수 없게 목자(牧者)를 잘못 만난 양(羊)일 뿐이다. 자신의 주도성과 자유를 양보하고 보호와 안정만을 간청하는 인간도 본질적으로 양(羊)이다. 그가 따르는 정부라는 목자가 항상 선할것이라 믿는 댓가는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치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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