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비평) '새로운 자본주의'를 낳을 도구로써 암호화폐

 


대체로 사람의 판단은 개념에 의해 이뤄진다. 개념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대체로 합의된 관념'이다. 개념은 Fact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 상식, 규범, 통념의 느슨한 집합이다. 

개념의 유기적인 집합체가 문화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한국인을 단일 민족으로 여기는 것,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보통선거를 천부적 권리로 여기는 것,  한국인은 이런 여러 가지 개념을 대체로 공유하며 한국인의 특징적인 문화를 만든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면 개념을 바꿔야 한다. 따라서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거나 조작하려는 모든 정치적 행위는 개념 주입의 도구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도구는 언론, 대중매체, 그리고 교육이다.

사회주의, 파시즘 모두 언론 통제와 대중 공작, 교육기관의 독점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이유, PC가 언론과 매체를 통해 되지도 않는 메세지를 주입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이런 면에서 개념은 진실(사실, 혹은 타당한 해결책)의 적이다. 진실에 가까워지려면 자신이 가진 개념의 근거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런 개념 중 하나가 민주주의는 위대한 가치, 자본주의는 비인간적인 제도로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사회를 어떤 위대한 이상에 따른 면밀한 계획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ic rationalism)'자들의 유서 깊은 개념 주입의 결과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말이 어렵다면, 사회주의, 파시즘, 기타 온건하지만 사회를 위한 똑똑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념의 총합이다. 이들 사이의 엄청난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똑같이 못 참는 것은 자신의 위대한 계획 없이 사회가 돌아가고, 심지어 번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게 재벌이나 기업을 욕하고 민주주의와 약자 보호를 떠든다면 '개념'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어떤 통찰력도, 해결책도 없이 남이 주입한 개념을 떠드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는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양 떼가 나온다.


실상은 이렇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낳았다. 다시 말하면 '시장'의 엄청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분과 힘을 획득한 부르주아가 만들어 낸 통치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다. 중세 유럽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적 신분제, 절대왕정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왕권신수설이었던 것과 같다. 민주주의가 이전의 것보다 더 논리적이거나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거부감이 드는가? 그럼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민주주의 원칙에서 대한민국을 너무 사랑하고, 세금을 엄청나게 내고, 남을 위해 한평생 희생하며 살아왔던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의 투표권은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의 투표권과 정확히 같다. 심지어 다른 정치적 권리도 같다. 이걸 어떤 정의의 원칙과 논리에 의해 정당화할 것인가?

못한다. 다만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논리적인 방식을 받아들였을 때 나타나는 사회적 효용이 그렇지 않았을 때 보다 훨씬 크다는 공리적 정당화만 가능할 뿐이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피를 보지 않고 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점, 한 명의 통치자가 아닌 다양한 힘의 균형에 의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도덕적 정당성은 허구다.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는 정확히 생산자가 원하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권력 교체를 위한 내전이 일어나는 곳, 통치자 한 명의 기분에 따라 사회 제도가 급변하거나 부를 몰수 당하는 사회에서 생산자가 살아남을 수 없다. 생산자의 시장 활동에 최적화된 제도, 이게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개인의 재산권+시장원리를 자본주의의 기반으로 볼 때, 지금까지 민주주의하에서만 이 시장이 제대로 작동했다.


지금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한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미국은 물론이고 서구 사회의 민주주의는 가망이 없을 정도로 병들었다. 대부분 이 원인으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과 한계를 꼽는다. 내 생각에 이는 잘못된 진단이다. 이 진단에 따라 자본주의, 즉 시장에 개입하는 더 많은 정책을 치료제로 쓴다면 인류 문명의 암흑기를 보게 될 것이다.

병든 것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결함이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 제도의 결함의 결과다. 그 결함은 이렇다. 민주주의 정부는 그간의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ic rationalism)' 정책에 따라 사회 전반에 개입했다. 국방과 치안, 법률 집행과 같은 기본적인 역할이 아니라 정부의 이념과 목적에 따라 사회 개조를 위해 개인의 영역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했다. 또한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유권자를 매수했다. 

이 과정이 인간성에 미친 참혹한 결과는 별론으로 하고, 이 모든 과정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비대해진 정부를 운영하고 압력단체에 특권을 주고 유권자에게 뇌물을 주는데 드는 돈은 세금을 통한 재정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국가가 가진 명목화폐의 발권력을 통해 돈을 찍어 해결할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국민이 화폐 가치 하락을 체감하지 못하는 정도로 계속 화폐를 타락시키며 돈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이게 현재 인플레이션의 본질이다. 인플레이션은 세금이다.

과도하게 개입적인 정부, 그리고 이로 인한 화폐의 타락은 필연적으로 시장, 그리고 자본주의를 병들게 한다. 약화된 시장은 부를 감소시키고, 이는 국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빈민을 양산한다. 그 결과 국가는 더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시장에 개입한다. 결국 사회 전반의 응집력이 한없이 약화하거나 강력하고 권위적인 정부를 불러온다.

이게 1, 2차 세계대전의 근본 원인이자, 지금 서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흐름이 반전된 적은 있다. 국제 자본주의 시장에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이 참여하여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이런 나라로 수출될 수 있었을 때, 물가상승률은 낮으면서도 생산성이 높아지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다. 국가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국제분업체제라는 거대한 시장을 파편화했다. 그 결과 인플레이션은 되돌아왔고, 막대한 거짓말과 부패로 유지되었던 서방 국가는 내부 통제력을 잃고 있다. 그리고 내부 혼란의 필연적인 결과로 국제 분쟁이 시작되었다.


잠시 프랑스 폭동 이야기를 해 보자. 17세의 '나헬 메르주크'라는 소년이 경찰에 총을 맞고 죽은 것을 개기로 광범위하고 예측 불가능한 폭동이 프랑스를 뒤덮었다. 경찰의 조치가 정당했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소년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알제리계로, 17세에 불과함에도 다양한 체포 전력이 있다. 사건 당시 위조된 폴란드 번호판을 단 벤츠 AMG 모델의 차로 여러 차례 제지에 불응하고 신호등과 건널목을 무시하고 달리다 오토바이 순찰대의 추격에 잡혔다. 이 상태에서도 운전석 쪽에서 제지 중인 경찰을 밀고 출발하는 모습이 동영상에 잡혀있다. 이 상태에서 경찰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2020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최소 11번의 중범죄 전과가 있는 조지 플로이드는 슈퍼마켓에서 위조수표를 사용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당시 펜타닐과 히로뽕 투약상태로 키가 198cm에 100kg이 넘는 거구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이 사람을 체포하려 했지만 길거리에서 주저앉고 경찰차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 장시간 저항하였다. 이때 경찰은 어떻게 해야 했었나?

둘 다 경찰이 최소한의 폭력을 사용하여 체포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어겼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당신이 신호등과 건널목을 무시하고 달리며 시민의 안전을 위험하게 하는 비행 청소년과 마약중독 상태의 100kg이 넘는 인물을 최소한의 합법적 위력으로 제지할 자신이 없다면 피의자의 권리만을 최우선으로 상황을 단정할 수는 없다. 위 두 사건의 결과는 같다. 광범위한 폭동과 사회 불안, 그리고 그 결과로 치안과 사회 응집력의 약화다. 이런 일에는 항상 사회에서 가장 해로운 집단이 앞장선다. 쓸데없는 국가의 간섭은 많아지는데 오히려 가장 필수적인 치안은 저하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다를까? 당신이 부당한 일을 당하여 경찰을 부를 때, 경찰은 여러 내부 규정과 경찰 직무 원칙, 피의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며 미온적으로 개입할 것이다. 각종 압력단체의 초법적 시위에 정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도 다를 바 없다. 이게 부패해 가는 민주주의 국가의 민낯이다.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아무도 책임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정부는 비대해지고 유권자는 정부에 의지하면서 뇌물을 바란다. 근시안적이고 책임감 없는 정책이 남발되며 법적 절차를 뛰어넘어 실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다양한 집단과 압력단체가 발흥한다. 이 결합이 현재 선진국이 겪는 혼란의 근원이다.


이제 민주주의를 치료해야 한다. 이 치료제는 비대해진 정부를 견제하여 시장과 화폐에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에게 책임에 기반한 권리를 고양하고, 사회적 기여에 기반하여 보상 하는 시스템을 재건하는 것이다.

이 치료제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치료 기전은 예전의 자본주의가 그랬듯, 다시 한번 생산성의 엄청난 혁신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의 상부구조가 사회의 하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했듯, 생산성을 급격히 올리는 시스템은 지금 서구 국가뿐 아니라 제3세계 국가의 사회 구조를 결정할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맹아인 부르주아는 분열하여 경쟁 중이던 봉건사회 한켠인 도시에서 태어났다. 내외적으로 절묘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던 곳이다. 이후 지방과 종교 세력을 억누르려는 절대왕정의 파트너가 되었다가 결국 최종 승자가 되었다. 모두 부르주아의 생산성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이 생산성은 이용자에게 이득을 주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인간 사회를 영원히 바꿔버렸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럼 어떤 방식이 자본주의를 다시 한번 혁신할 것인가? 별것이 아니다. 시장의 거래 도구인 화폐 자체도 완전히 시장화하는 것이다. 단지 이것뿐이다.

근대화와 서구의 주도권을 결정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근대화한 유럽 국가 사이의 안정적인 금본위제의 수립이다. 1867년 '유럽 통화 회의' 이후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일어난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유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교통-통신 기술은 물론 자연과학적 인식의 발전까지 모든 인류 혁신의 기반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이때 개척된 기술적 돌파구를 확장하는 일 외에 근본적인 발견을 한 것이 없다. 모두 비인격적인 거래가 일어나는 국제화된 시장과 신뢰할 수 있는 화폐가 만나 일어난 일이다.

1914년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이런 혁신이 좌절된 역사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세계의 주도권을 휘두르는 권력 중심에서 부유하고 한적한 동네로 전락했다. 지금은 가끔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철없는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금본위제는 1971년 최종적으로 무너졌다. 그 이후로 시장과 자본주의가 천천히 잠식되었고, 이에 따라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도 무너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비약적 발전과 건전한 민주주의 체제의 부활은 건전한 화폐의 부활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건전한 화폐의 제1 조건은 권력자에 의한 자의적인 발행 금지다. 자연적 산물이나 거스를 수 없는 탈중앙화된 운용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금의 가치는 누가 정하나? 확실한 것은 권력자가 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욕망이 시장에서 반영되어 결정된 것이 금의 시장가다. 이 시장가를 기준으로 화폐 제도를 운용했던 순간이 인류는 도약했다.

이제 유럽 국가 몇이 모여 자연스레 금본위제를 약속하는 수준의 합의는 불가능하다. 모든 정부가 명목화폐 제도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명목화폐 제도를 포기하게 할 충격을 통해서만 새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하다.

둘째는 간편한 전자적 거래다. 금이 앞으로 화폐로 갖는 단점이 바로 이것이다. 금덩이를 갖고 직접 거래하기 불편하고 외국에 대량으로 가져갈 수 없다. 단순한 거래를 위해서 누군가 강력한 제삼자가 금 소유권을 증권화하여야 한다. 사실 예전 금본위제나 금환본위제가 이런 식이었다. 결국 국가나 강력한 기업이 금 지급을 보증하는 역할을 떠맡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앞으로 금은 시장에서 유력한 화폐 중 하나가 될 수 있어도 압도적인 화폐가 될 수는 없다.


이 둘을 현실화할 것이 암호화폐다. 암호화폐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새로운 방향으로 인류를 움직일 지렛대라는 점 때문이다.

또 하나, 암호화폐의 진정한 가치는 전 세계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자원과 자산을 화폐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 컴퓨터에 사용되지 않는 컴퓨팅 파워, 수많은 출판물과 저작물의 소유권, 기타 생각치도 못했지만 누군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 smart contract를 통해 자산화될 수 있다. 그 결과 주식, 채권, 부동산으로 나뉘어 거래되는 자산 시장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다 결국 사라질 것이다.

현재 자산 시장을 보자. 주식은 주식회사의 사원의 권리와 출자금을 증권화한 것이다. 채권은 차용증이자 확정된 이자를 약속하는 증권이다. 부동산 거래에도 다양한 거래 방식의 자산 시장이 있다. 

상상을 해 보자. 어떤 자산이 회사 출자에 관한 발언권이자, 동시에 채권자의 권리를 증권화한 것이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이 증권을 국경과 거래소의 장벽을 넘어 전 세계에서 거래하면 어떨까? 부동산을 다수의 사람이 소유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자동으로 분배하면 어떤가? 물물교환보다 화폐경제가 좋은 이유는 거래가 간편하고 거래비용이 극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금 자산의 거래방식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 볼 때 물물교환처럼 미개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물교환에서 화폐경제로의 전환이 만들어 낸 거대한 부의 증가 못지않게, 지금 자산 거래방식이 새로운 화폐제도와 smart contract와 만나 일어날 혁신은 거대할 것이다.


또 한번 상상을 해 보자. 미래 어느 시점의 우리나라에 사용되는 화폐가 다양하다. 당신은 그걸 적절히 선택할 수 있다. 가치를 저장하는 화폐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화폐, 어떤 회사의 제품을 구입하는데 유리한 화폐, 다양한 화폐 중 당신은 선택권을 갖는다. 화폐 간 환전은 스마트폰 수준에서 즉시 이뤄진다. 당신은 환전 없이 세계 여행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외국에 전 재산을 가지고 나가 은퇴할 수도 있다. 가치 저장이 안되는 화폐는 시장에서 퇴출 당한다. 만약 믿을 수 없는 화폐를 갖고 있다가 생기는 문제는 오로지 당신 책임이다. 따라서 가능하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믿을 수 있는 화폐를 선택해야 한다.

자유롭게 부를 이전할 수 있는 화폐를 사용하는 사람은 국수주의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말레이시아에서 터를 잡고 살다, 캐나다에서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애국을 강요하거나 국가가 원하는 개념을 주입할 수 없다. 국가의 역할은 다양한 유인을 통해 부를 국내로 유인하는 것이므로 과도한 세금,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제도, 과도한 시장 개입이 불가능해진다.

이런 세상에서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사람들과 국가의 결속력도 줄어든다. 국가는 막대한 비용을 징발하고 개인을 세뇌하여 전쟁에 나설 능력이 없어진다. 대규모 전쟁은 개인에 대한 근대 국가의 장악력이 약화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은 중국이나 미국이 싫은가? 혹은 특정 국가가 싫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나라의 국민이나 정부가 당신에게 직접 피해를 주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특정 나라가 싫은 것도 사실 외부의 무자비한 개념 주입의 결과다. 당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사실 당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누군가 개념을 주입한 결과다. 생각해보면 으스스한 일이다.

실제 중국이나 미국의 정책이 나의 삶에 간접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 정도는 우리나라 정부가 나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당신이 중국 정부에 세금을 뜯기지는 않지 않은가? 

나에게 가장 피해를 주는 사람은 내 주변 사람이지 멀리 있는 중국이나 미국 사람이 아니다. 진실은 이렇다. 시장에서 비인격적인 거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 한국에 내다 팔 고추를 말리는 중국 농민, 한국에 팔 소재-부품을 연구하는 일본의 기술자 모두 내 친구다. 내가 만든 상품을 사가는 세상 모든 사람도 내 친구다. 내 친구가 아닌 사람은 사회에 아무런 역할도 없이 특권만을 요구하는 국내의 모든 기생충들이다.


암호화폐는 국민-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개인, 새장 속의 안전보다 위험을 무릅쓴 자유, 정부의 온화한 지도보다 개인의 선택을 원한 인간들이 만들었다. 이 세상에 부패하지 않는 화폐가 필요하다고 믿은 인간들이 만들었다. 이 믿음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 100%가 넘는 인플레이션에 고통 받는 아르헨티나 시민, 하루 아침에 자산을 몰수당한 러시아 재벌, 은행에 접근조차 못하는 세계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올라버린 물가 때문에 삶이 팍팍해진 당신도 이 중 하나다.


약자의 편인 척 코스프레를 하는 게 당신의 통찰력과 도덕성을 고양하지 못한다. 당신에게 진정한 통찰을 제공하고 도덕성을 높여 더 높은 인간의 상태로 만드는 것에는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 

신의 뜻이라는 것이 사기이고, 계급질서라는 게 정당성을 빙자한 억압의 도구라는 통찰이 만들어 낸 근대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안전하고 부유하게 했는지 생각해보라. 세상에 특권을 가진 인간은 없고, 신에게 뇌물로 구원을 살 수 없으며, 정복보다 거래가 인간을 더 부유하게 한다고 믿은 계급이 이룬 성과를 보라.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벽한 중세인도 인간을 이보다 더 도울수 없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하찮은 동정심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비인격적인 거래에서 진정으로 남을 도울 수 있고, 이 거래에서 나를 돕는 존재는 모두 내 친구라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사를 잊지 않겠다며 특정 일본 브랜드를 불매운동 하려는 생각이 얼마나 하찮은지, 국경이라는 부자연스러운 경계와 민족이라는 허구의 공동체의 틀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한지 알 수 있다. 이 견지에서 인류는 하나라는 말은 감성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는 실제 인식의 확장을 통해 통합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새로운 화폐제도가 만들어 낼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인간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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