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경제의 상반된 두 가지 양상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에 마침표를 찍고 부활할 기미를 보인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이런 긍정적인 뉴스와 달리 실제 일본인의 삶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이야기다.
일본으로 들어오는 외국 자금이 급증하고, 닛케이 지수가 올해만 30% 급등하고, 경제 성장률이 올라가고, 디플레이션이 끝나가는 거시지표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험해 보지 못한 물가 상승으로 일본 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대체 나라 경제가 살아나는 듯 보이는데 국민은 가난해지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려울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이는 화폐 타락 증상이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주식도 오르고, 상품가격도 오르고 있다. 주식이 오르면 주식은 주로 부자가 가지고 있으니 부자는 좋고, 상품은 일반 시민이 소비해야 하니 상품가격이 오르면 시민들은 힘든 것이다. 화폐 타락 현상이 서로 다른 경제주체에게 다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정상적인 엔화약세,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과 같은 주가 부양책이 섞여 나타나는 현상으로 일본 경제가 실질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
100%가 넘는 기준금리에도 물가가 잡히지 않는 아르헨티나도 올해 주가는 200% 가까이 올랐다. 아르헨티나 기업이 너무 경쟁력이 있어서 주가가 그렇게 올랐겠는가? 아니다. 주가 대비 명목화폐의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폐보다 주식을 갖고 있는 것이 그나마 가치를 지킨 것뿐이다.
어떤 나라에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은 생산에 혁신이 일어나고, 상품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가계의 소득도 높아져 그 결과 상품의 소비도 느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게 화폐량의 급격한 증가 없이 일어난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성장하는 것이다. 요즘 원자재를 파는 개발도상국 일부 외에 경제가 발전하는 경우가 드물다.
일본은 마지막까지 돈을 풀고 있는 나라다. 미국과의 금리차가 5%에 육박한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이를 오래 견딜 수 없다. 일본은 곧 미국 경기가 위축되어 미국이 금리를 다시 내리리라는 것에 도박을 걸고 있다.
안전제일의 일본이 왜 도박을 하게 되었는가? 간단하다. 일본이 다른 나라처럼 금리 인상, 즉 지금까지 해 온 완화정책을 포기한다면 정부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도 일본 전체 예산 중 25%를 국채 원리금을 값는데 쓰고 있다. 만약 지불해야 할 국채 이자가 2%만 올라도 이자를 갚는데만 15조 엔을 더 써야 한다. 일본 1년 예산이 대략 107조엔 정도다. 일본은 국채금리가 0%대에 머물지 않으면 국가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무슨 희생을 해서라도 국채 금리를 1% 미만에서 억누르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 어쩔 수 없이 같이 달릴수 밖에 없는 게 일본의 신세다.
막대하게 풀려나간 돈 앞에서 결국 일본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그 수반되는 효과로서 일본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고, 엔저 효과에 따라 일본 상품의 수출이 반짝 좋아지고 있다고 보는 게 지금 일본 경제를 정확히 보는 것이라 확신한다.
이 인플레이션의 가장 두드러진 효과로, 부(副)가 국민의 손에서 일부 기업과 국가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국가와 수출 대기업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데 서민들 삶이 팍팍해지는 현상의 이유다. 이는 지속될 수 없다. 인플레이션은 징세이기 때문이다. 서민을 타겟으로 한 약탈적 징세를 한없이 계속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국채 이자를 끝까지 조작하면서 국가의 빚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한없이 할 수도 없다. 자국 통화 가치를 계속 낮춰 주변 나라에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한없이 할 수도 없다. 결국 이 일에는 끝이 있다. 화폐의 무한 공급이라는 마약이 끊겼을 때 나타날 고통은 참혹할 것이다.
일본 경제는 임박한 경제위기에 진앙이 되거나, 다른 진앙에서 몰려오는 파장에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도 미국과의 금리차가 2%다. 주가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이 와중에 막대한 돈을 푸는 부동산 부양책까지 쓰고 있다. 그런데도 주식과 자산시장에 큰 일은 일어나고 않았다. 이걸 두고 우리가 별문제가 없다고 자화자찬하고 있고,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기만 하면 우리 경제도 우상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가 일본은 국가, 한국은 민간 분야가 앉고 있다는 점을 빼면 한국은 일본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이 도박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도박을 하고 있다.
미국은 더 웃긴다. 미국 국채 이자를 갚는데 한국 전체 예산의 1.5배를 쓰고 있다. 원화로 대략 900조에 육박하는 돈이다. 명목화폐의 기축통화국답게, 이 이자는 그냥 달러를 찍어 갚고 있다. 이렇게 풀린 돈은 전 세계로 수출되어 모든 화폐 가치를 절하시킨다. 결국 달러 가치도 절하되 인플레이션에 고통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코로나 시기에 국가가 국민에게 직접 뿌린 막대한 초과저축이 사라지는 순간 미국도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초과저축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지표에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당신이 너무 올라버린 물가에 화가 나는가? 그 돈은 국가가 몰래 세금으로 걷어간 것이다. 표현은 다르게 할지라도, 이 본질을 부인하는 제대로 된 경제학자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세금이다. 일본, 한국, 미국, 전세계에서 인플레이션에 고통받는 사람 모두 국가에 세금을 뜯기고 있는 것이다.
이 세금에 더 무서운 특징이 있다. 이 세금은 고정된 급여나 연금으로 생활하는 자, 생활에 사용하고 나면 초과로 저축하거나 투자할 돈이 없는 자, 돈이 풀리는 원점에서 멀리 있는 자, 즉 힘없는 사람에게 선택적으로 더 많이 징수된다. 인플레이션을 다른 소비자나 경제 주체에게 전가할 수 있는 기업, 사업가에게는 피해가 없다. 자산을 분산하여 부동산, 주식, 채권, 귀금속에 투자한 사람도 인플레이션을 피해갈 수 있다. 즉 강자는 더 강하게, 약자는 더 약하게 한다. 이는 한 사회를 파괴한다. 지금 여러 국가가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
2. 중국 비구이위안 사태로 중국 부동산발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모양이다. 중국의 토지 기반 돈 풀기 정책은 2년 전부터 파열음을 내고 있다. 서구 언론에서 이런 상황을 일본 버블붕괴와 비교하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아마 이 말이 맞을 것이다. 중국이 서서히 디플레를 겪으며 쇠퇴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예전에 병자(病子)가 된 유럽을 포함하여, 전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짓눌려 있다. 서로 상대방의 빚이 먼저 터지길 기도하는 중이다.
다른 측면의 이야기도 있다. 유럽 가전 전시회(IFA 2023)에서 중국은 삼성 폴더블폰을 일면 능가하는 듯 보이는 스마트폰을 공개했다. 이외에도 가전 분야에서 위협적인 제품들을 대거 공개했다. 중국 전기차의 경쟁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과 미국의 상용차들이 오히려 중국을 목표로 추격하는 상황이다. 더 충격적인 것도 있다. 화웨이의 최신 스마트폰에 7나노급 반도체가 탑재된 것이 확인되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정만 할 뿐, 정확한 방법도 파악되지 않았다.
미국의 대중 경쟁 전략의 핵심은 절대적 우위를 가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여 중국의 기술 발전과 군사력의 고도화를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상당히 허망하게 돌파되었다.
아마 중국이 7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하는 비용은 전혀 경제성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첨단 반도체를 국가의 명운을 걸고 만들어야 할 핵심 물자라고 판단한다면 경제성을 따질 여지가 없다. 중국에 반도체가 이런 물자다. 큰 희생을 하더라도 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터보제트 엔진 이야기를 해 보자. 군사용 항공기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소련제 엔진을 무단으로 하드카피하여 조잡하게 기술을 흉내 내던 중국은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 최근에 미국산 엔진에 필적할 만하다는 ws15 엔진을 만들어 냈다. 이를 J-20에 장착하여 대량으로 스텔스 전투기를 찍어내고 있다. 궁하면 통한다. 미국으로부터 체제위협을 받고 있다고 믿는 나라는 생존을 위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거짓말 같으면 북한을 보라.
중국이 앞으로 올 경제위기에서 멀쩡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진앙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은 거대한 북한처럼 변하는 듯하다. 그나마 존재했던 집단 지도체제가 사라지고, 시장에 대한 간섭은 심해지고, 국가의 폐쇄성은 더 커져 간다. 이런 나라와 장기적으로 시장이 양립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런 체제와 동양인의 특성이 합쳐지면 생각보다 질긴 생존력이 발휘된다, 북한을 보라. 북한이 서서히 곪지만 뻥 하고 터지지 않는 것처럼 중국도 일본과 같은 장기간의 불황과 경제적 혼란을 겪을 수는 있어도 중국판 IMF를 겪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나라의 제도와 특성이 그렇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내부가 혼란스러운 나라는 호전적이 되기 쉽다. 이런 면에서 다음 경제 불황에서 중국은 더욱 호전적이고 비타협적으로 될 것이다. 이때가 미-중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다.
3. 냉정하게 말하자면 미국의 중국 봉쇄정책은 이미 실패했다. 서태평양에서 중국은 이미 군사력으로 미국을 압도했다. 여기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 더욱 커진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국과 일본, 심지어 호주까지 끌어들이는 이유다. 반도체와 첨단 기술을 이용한 경제 봉쇄도 위에 말했듯 이미 실패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과는 별도로, 중국 기업은 첨단 산업에서 나름 인상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산업생산 능력과 그 첨단성 면에서 중국인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고 봐야 한다. 이전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중뽕환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시장적-권위주의 정부를 극혐한다. 내 호불호와 상관 없이 있는 것은 그대로 봐야 한다.
외교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는 것도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제3세계, 혹은 global south와 서구 선진국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전자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중국이다. 유럽과 미국, 여기에 어설프게 발을 담근 한국과 일본이 오히려 인구, 생산성, 기술, 군사적 측면에서 비서구권 국가에 포위되는 느낌이다.
미국은 내외적으로 리더십 부재에 고통받고 있다. 서구권 국가를 하나로 모아 단일한 대오로 세울 능력도 없고, 치밀하고 굳건한 태도로 중국을 억누를 의지와 능력도 없다. 망설임이 가득한 조잡하고 앞뒤가 안 맞는 계획을 산발적으로 실행하면서 중국이 알아서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른바 천수답 전략이다. 그 와중에 동맹에 무언가를 베풀기는커녕, 우리의 핵심 산업 생산시설을 미국에 짓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런 리더십으로 동맹을 장기간 잡아둘 수 없다.
4. 러-우전 때문에 캅카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조지아의 내전과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만성적인 분쟁이 일어난 지역이다. 러시아가 여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자 터키, 이스라엘, 이란, 여러 나라가 몰래 이곳에 힘을 투사하고 있다. 그 결과 이곳에 잠재한 분쟁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또 다른 충돌은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처럼 두 나라가 투닥거리다 끝나면 좋지만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는 터키와 이스라엘, 아제르바이잔과 관계가 최악인 이란이 분쟁에 개입하면 소아시아판 러우전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5. 혁신은 혼란을 먹고 자란다. 한국에 혁신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지대추구(地代追求)가 만연한 나라에 혁신이 들어설 곳이 없다. 동남아에도 있는 우버, 그랩과 같은 서비스가 택시업계에 막혀 무산된 것을 보라. 덕분에 당신은 아직도 늦은 시간에 고령자가 운전하는 냄새나고 비싼 택시를 잡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혁신이 일으킬지 모르는 사소한 혼란보다 지대추구자들이 강요한 안정을 택했다.
우리가 부패한 명목화폐 제도에 붙잡혀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그 붕괴 이후까지, 명목화폐 제도를 사실상 유지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달러다. 달러의 힘은 미국의 힘에 기반한다. 미국이 정신 못 차린 지금 달러의 힘이 약해진다. 그리고 이게 암호화폐에 큰 기회를 준다.
다음 세계를 누가 이끌어갈까? 당연히 기술, 인구와 영토, 경제력, 소프트파워 면에서 체급을 갖춘 나라나 나라의 연합체일 것이다. 장담하는데 이 존재는 지금과 다른 화폐제도를 운영할 것이다. 아마도 CBDC이거나 이와 유사한 암호화폐일 것이다. CBDC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자면 은행과 은행 계좌가 필요 없다는 점이다. 국제 경제 측면에서 이 특성이 가진 가장 뚜렷하고 파괴적인 면은 유력한 외환을 은행 계좌가 아니라 개인의 계정에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국가의 외환 통제 능력이 무력화된다.
지금까지 극심한 자국 화폐의 인플레이션에 그 나라 국민이 대응하는 방법은 돈을 최대한 빨리 물건이나 귀금속, 외환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 오늘 해장국 100그릇을 미리 먹어둘 수 없고, 저장공간에도 한계가 있다. 귀금속과 외환은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하고 압수할 수도 있다. 따라서, 터키,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 시민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자국 화폐를 계속 쓰는 이유는 국가가 이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지금도 가치가 사라지는 자국 화폐를 달러로 교환하여 가치를 지키는 것에 큰 제한을 받고 있다. 은행에서 외환을 통제하고 말도 안되는 환율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전에는 달러 예금을 강제로 동결하고 가치가 없는 자국 화폐로 준 적도 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국민이 달러로 재산을 지키고 싶으면 암달러상에게 달러를 사서 은행이 아닌 집에 보관한다.
만약 달러를 개인의 전자 계정으로 거래하고 보관할 수 있다면? 이걸로 손쉽게 재화와 용역으로 교환할 수 있다면? 허약한 국가의 화폐는 농약에 노출된 잡초처럼 사라진다. 아무도 가치가 불안정한 자국의 화폐로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의 원화가 급격히 가치가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오늘 해장국이 10,000원이었는데 일주일 뒤에 15,000원, 그리고 한 달 뒤에 20,000원이 된다고 치자. 이에 반해 달러는 그 가치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런 일이 일어나는 나라가 부지기수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CBDC가 존재한다면 나는 내 재산을 여러 CBDC 외환으로 교환해 놓았을 것이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기미가 보이면 외환 보유량을 더 늘릴 것이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원화 가치가 거의 사라진다고 해도 어디서든 10달러 정도의 CBDC를 지불하면 맛있게 국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밥집 주인도 이런 거래를 반길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 법정화폐는 원화지만 다른 나라의 화폐가 시장에서 사용되는 상황이 된다. 정부는 이를 통제할 수단이 없다.
이런 식으로 강력한 국가의 CBDC는 허약한 나라의 통화 주권을 무력화할 수 있다. 자국의 통화를 발행하여 재정을 집행하고, 경제를 운영할 능력을 잃은 국가는 사실상 경제 식민지다. CBDC는 다른 나라를 경제적으로 침공할 도구다.
물론 유력한 CBDC는 그 가치를 유지하는 어떤 장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달러처럼 제멋대로 찍어내지는 못하는 어떤 제한을 둘 것이다. 원자재나 귀금속으로 그 가치를 보장할 수도 있고, 법적 절차로 발행량에 제한을 둘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CBDC 간 경쟁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CBDC가 이런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모든 나라의 정부와 중앙은행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이를 선뜻 적용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그 파괴력 때문이다. 우선 정부도 일부 화폐주조권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은행의 "신용 창조" 효과 없는 화폐 공급이 어떤 상황을 만들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또한 CBDC는 은행을 불필요하게 한다. 은행 대부분은 사라지거나 그 역할의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은행이 사라진 세상이 어떤 변화를 유발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CBDC를 도입한다는 것은 자신의 특권을 일부 내려놓고, 은행과 기존 금융계의 극렬한 저항을 뚫고, 전인미답의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화폐제도의 변화를 받아들이려면 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명목화폐 제도가 붕괴될 상황이거나 다른 나라가 이미 CBDC를 운용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을 때다.
나는 미국이 아직도 가장 강력한 CBDC를 운영할 나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단, 체제 경쟁에서 강한 압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을 때 무겁게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중국은 CBDC를 가장 본격적으로 시행한 나라다. 지금 위안화 CBDC 사용액은 이미 10조 원을 넘었고, 사용처도 속속 늘리고 있다. 위안화 CBDC를 외국의 개인과 기업에 전면 개방하는 것은 아직 먼 이야기지만 허용된 국가나 외국 기업 사이의 사용을 서서히 시도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BRICS의 확대는 눈여겨봐야 한다. 이들 국가 사이의 국제 통화체제를 만들려는 제안은 이미 예전에 시작되었다. 우선은 자기들만의 특별인출권(SDR)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이들 국가 사이 기업이나 개인이 사용하는 공통의 통화체제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최근 사우디, UAE, 이란, 아르헨티나와 같은 규모와 원자재 생산능력을 갖춘 나라가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블럭을 주도하는 것은 중국이다. 자국 내 CBDC 사용과 결합하여 달러에 대응하는 어떤 움직임이 나올 것이다.
여러 차례 말했듯, CBDC의 도입은 명목화폐에서 암호화폐를 포함한 '화폐의 시장화'로 가는 전환기에 나타나는 화폐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가는 중간단계에 나타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비슷하다. 물론 화폐의 시장화 이후에도 유력한 CBDC는 계속 사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혁신은 혼란을 먹고 자란다. 앞으로 우리 인생에 상당 기간, 안정과 평화 대신 혼란과 충돌이 만연할 것이다. 혼란이 클수록 태어날 혁신이 눈부실 것이다.
글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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