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다. 불과 5년도 안 돼서 달라진 이런 국제질서와 환경은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 바로 미국의 약화와 중국의 부상이다. 이로 인해 나타난 증상은 다음과 같다.
- 국제 경제 공급망의 단절과 경제 블록화
- 지정학적 다극화와 지역 강대국의 영향력 확대
- 제삼 세계의 중국, 러시아 의존 증가
1번은 따로 예를 들 필요 없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첨단반도체에 접근하는 것을 봉쇄하려 하고, 중국은 독점적인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다. 삼성과 하이닉스, 기타 한국 기업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고 있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지정학적 다국화의 결과로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이집트, 이란, 일본, 브라질과 같은 나라의 발언권이 상당해졌다. 이런 나라들의 영향력이 커진 이유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후퇴한 지역에서 힘을 확대할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걸프 지역 산유국은 단절된 공급망에서 선택권이 커졌기 때문에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제삼 세계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영향력 없는 나라가 사우디와 이란 사이를 중재할 수 있을 리 없다. 제삼 세계 투자와 인프라 건설, 무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미국을 한참 전에 넘어섰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적절한 대중 정책을 세울 수 없다. 서방의 제재를 받는 것과는 별도로, 러시아는 아프리카 사헬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식량과 에너지를 무기로 비서구권 국가에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뿐 아니라 서구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비서구권의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 근본에는 미국의 쇠퇴뿐 아니라 중국이라는 대안적 존재가 있다.
이런 변화는 대략 4~5년 사이에 한국에 큰 시련을 안겨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미국과 중국이 열전을 벌이지 않고 적당한 냉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한국이 지금처럼 적당히 고통받는 것이다. 이보다 조금 더 나쁜 시나리오는 대만이나 남중국해 어느 곳에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고 한국이 간신히 명목상 중립과 전쟁 불개입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더 나쁜 상황은 이 두 나라의 분쟁에 직간접적으로 한국이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한국과 한국 사회에 최악의 결과는 이게 아니다.
한반도의 최악의 결과는 트럼프의 재선과 함께 시작한다. 트럼프를 재선에 이르게 한 미국 내 정치적 역동과는 별개로 트럼프는 정상적인 외교를 할 가능성이 없다. 트럼프는 대만에 대한 개입을 공언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이런 행동은 "그렇게 말하면 거저 주는 것이다. 이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말했다. 대만에서 뭔가 받지 않는 한 공짜로 대만을 방어해 주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게는 미국 패권의 기초가 뭔지,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위신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런 이해가 없다.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은 도박판의 판돈이다. 이 도박판에서 미국만 이득을 보면 된다. 이런 사람이 가뜩이나 쇠퇴하는 범서방권을 이끌 수 있을까?
트럼프의 한반도 정책은 대단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우선 한국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북한과 협상 할 것이다. 대략 핵농축을 중단하고, IAEA 핵 사찰을 받고,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투발 수단을 제한하는 수준으로 북한의 핵을 용인할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주한미군 방위비와 같은 것을 쟁점화하여 한국인의 반감에 불을 지를 것이다. 이 사람의 세계관에서 주한미군은 미국의 힘을 동북아에 현시하는 전략 자산도 아니고 한국도 동북아의 핵심적인 미국의 우방도 아니다. 그냥 미국이 지켜주는 짐 덩어리다. 이는 어느 정도 일본에도 마찬가지다. 일본도 미국이 독자적으로 북한의 핵을 인정하는 것을 좌시할 리 없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전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에서 미국은 확실하게 평판과 신뢰를 잃는다. 미국은 배신자나 비열한 기회주의자로 비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정치 세력이던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한국과 일본, 대만의 유권자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동북아 국가는 실질적으로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미국과 결별한다.
국민 사이에서 국수주의적 감정이 강력한 힘을 얻을 것이다. "한국은 배신당했다. 호전적이고 강력한 적들에게 포위됐다. 우리가 남을 쉽게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를 지킬 것은 우리뿐이다. 어떤 해외의 동맹을 찾는 자들은 잠재적인 배신자다." 누가 이런 감정이 일으킨 동력을 정치적으로 차지할지 쉽게 예상할 수 없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586 운동권 세력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친중-친북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주변 세력에 적대적인 한국식 국수주의, 혹은 기존 모든 무능한 정치 세력에 적대적인 한국식 파시즘의 시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관용과 다양성, 절차적 정당성, 자유가 질식한다. 중국과 나치독일 사회를 생각해 보라.
필연적인 결과로 한국, 일본은 독자적인 핵무장을 시작할 것이다. 동북아에서 미국이 사라지고 주요국이 모두 핵무기를 들고 대치하는 상황... 이게 한국에 가장 참혹한 결과다. 호가호위하다 갑자기 호랑이한테 버림받은 여우의 처지다. 이게 일으킬 외교-안보적 위험뿐 아니라 한국 사회 내부에 일으킬 변화도 참혹하다.
이런 모든 참혹한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 시작은 트럼프의 당선이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라는 개인이 시작한 일은 아니다. 국제화에 소외된 미국 중산층, 말도 안 되는 political correctness에 염증을 느낀 시민,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 정책의 반복된 실패의 반작용.. 등등 미국 유권자는 기존 정치권의 정책과 사회 분위기에 반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바구니를 버리다 아이도 같이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강력하고 호전적인 경쟁자가 등장한 지금, 미국은 자족적이고 고립된 북아메리카의 평화로운 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을 규합하지 않고는 위태롭게 존재하는 패권을 유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패권을 잃은 나라의 운명은 비참하다.
현재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은 명확하다. 바로 미국과의 일체화다. 난 현 정부의 외교 노선에 상당히 놀랐다. 그 정도가 한국의 국익 범위를 때문이다. 한국이 정신적으로 서구사회이고, 따라서 서구와 입장을 함께해야 하는 것은 이해한다. 중국이 한국과 정체성이 다른 현상 전복 세력이고 불쾌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도 좌시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 편에서 동북아의 현상 변경을 거부하고 힘의 균형을 맞추되, 두 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찾는 게 한국의 국익에 부합한다. 현 정부는 이게 불가능하다며, 확실히 미국 편에 서는 것 외에 선택권이 없다고 보는 듯하다. 이게 현 집권층의 판단이다.
이 판단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미국의 대(對)중국-동아시아 정책이 일관성 있게 유지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위에 말했듯, 이 전제가 수년 내에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운 좋게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더라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더 착취적이고 자국 중심적이 될 것이다. 지금도 한국 기업을 협박해 최첨단 반도체와 이차 전지, 정유 시설을 미국에 가져가고 있다. 한국에 있으면 한국 경제와 고용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누구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것은 부당한 대우와 착취를 부르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이 모든 상황에서 10위 권의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 강력한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 무시할 수 없는 소프트파워를 가진 나라가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미국의 외교 정책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국뽕이 아니다. 중국이 불쾌한 현상 변경(changing status quo) 세력인 것과는 별개로, 상호 이익이 되는 정치-경제적 협력은 계속해야 한다. 러시아가 유럽에서 힘으로 국경을 변경하려는 행위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러시아와 한국은 경제-사회적으로 완전한 찰떡궁합이다. 동북아의 잠재적인 파트너라는 것을 잊지 말고 처신해야 한다. 일본은 그나마 동북아에 한국과 가치가 비슷한 나라다. 대(對)중국 힘의 균형에서 협력할 여지가 많은 나라다. 말 같지 않은 반일 선동에 휘둘리지 말고 정치-경제적 협력은 심화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과의 대화다. 북한이 겁에 질리거나 상황을 오판하여 이상한 짓을 하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지금 가장 필요하다. 위에 말한 모든 것은 한국 국익에 부합하는 우리의 외교 정책이다.
지금 정부는 난데없이 트럼프도 포기하겠다는 대만의 안보에 대해 중국에 일갈하거나, 눈치 없이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다. 북한과 어떤 대화를 하는 신호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의 협력은 그나마 돌아가는듯 하다. 이걸 미국이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즉 한국은 미국의 졸(卒)처럼 행동하고 있다.
국가의 전략이 그렇듯 지금부터 한국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미국이 동북아 동맹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대(對)북-대(對)중국 정책을 강요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북아 국가를 도박판 판돈처럼 사용하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치 자신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지켜주기라도 하는 듯 모욕적인 언행으로 국민감정을 건드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우리에게 돌아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안타깝지만 제한적이다. 독자적인 외교-군사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른바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라는 자들은 이런 생각이 비현실적인 일이라며 비웃는다. 한국 경제는 소규모 개방 경제라 미국-서구 사회의 협조 없이 생존이 불가능하고, 주한 미군의 도움 없이 최첨단 군사력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앵무새처럼 나올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한국이 서구-미국의 경제적 연결 없이 유지되기 힘든 만큼, 서구 모든 나라도 한국의 반도체, 2차 전지, 기타 핵심 산업 생산력 없이 유지될 수 없다. 미국과 한국이 최첨단 군사력이 없어서 북한을 어쩌지 못하는 게 아니다. 즉, 한국이 독자적인 국가 전략을 추구하더라도 미국과 서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최첨단 군사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파괴력 있는 무기다 바로 핵무기다.
이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바로 핵무장이다. 그것도 주변국에 위협 수준의 수십 발이 아니라 위협 국가의 확증 파괴를 보장하는 수준으로 수백 발 이상 가능한 많이 준비해야 한다. 수소폭탄 뿐 아니라 정교하고 요격하기 힘든 장거리 투발 수단도 가져야 한다. 가장 확실한 보복 수단인 핵 탑재-핵 추진 잠수함도 필요하다. 이 수준이 되면 주변국이 한국에 군사적 수단을 고려하는 것을 포기할 것이고, 우리가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이상한 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존재를 우리가 짐처럼 여길 것이다. 동북아와 관련 없는 미국의 분쟁에 오히려 한국이 말려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리조차 못하는 최첨단 F-35 스텔스 전투기보다 우리가 사용을 결정할 수 있는 70년 전 개발된 핵무기가 우리를 더 잘 지켜줄 수 있다. 게다가 이게 훨씬 더 저렴하다. 장담하는데 수 년 뒤에 이 이야기를 더 이상 현실성 없는 몽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길을 일본은 확실히 간다. 신뢰할 수 없는 미국의 도움 없이 중국과 러시아에 대응할 방법이 이것 외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도 생존을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 아...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하다. 미국 대신 중국이나 일본에 의존하는 것이다.
지금 동북아의 위험은 초강대국화된 중국과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다. 이 둘 다 지난 20년간 유서 깊은 미국의 국가 전략 실패의 결과물이다.
미국은 중국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걸 생산하는 공장 정도로 우습게 봤다. 그 결과 중국은 거대한 산업 국가가 됐다. 중국을 견제할 시기도 놓친 후에는 어설프게 압박하여 중국은 사활을 걸고 군사력과 첨단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탈(脫) 서방을 준비했다. 미국이 최근 10년간 한 일은 마라톤 선수 앞에서 pacemaker 역할을 해 준 것에 가깝다. 그 덕분에 중국은 가만히 뒀을 때 보다 훨씬 강력하고 위험해졌다.
북한이 핵무기를 고도화하고, 수소폭탄을 만들고, 다양한 투발 수단을 개발하는 동안 미국은 한 일이 없다. 북한에 참을 수 있는 만큼의 경제적 고통만 안겨서 북한이 더욱 사력을 다해 핵 무기를 고도화하고 핵무기에 집착하게 했을 뿐이다. 그 결과 북한은 훨씬 말이 안 통하는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미국은 동북아에 독을 풀고 거만한 자세로 해독제를 팔려 하고 있다.
“국제정치(國際政治)에는 영원한 우방(友邦)도 없고, 영원한 적(敵)도 없다. 오로지 우리의 이익(利益)만이 있을 뿐이다.” 파머스턴(H. Palmerston)이 말했던 너무나 진부해진 명언을 앞으로 우리는 뼈저리게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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