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이 올해 꽤 강세를 보이고 있다. 비트코인에 대한 기대감을 올리는 단기 호재는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임박, 그리고 내년 초로 다가온 비트코인 반감기다. 전자는 비트코인이 주류 금융 시스템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고, 후자는 비트코인 반감기 이후 가격이 폭등했다는 과거 경험에 바탕을 둔 기술적 예상이다.
둘 다 타당한 면이 있다. 비트코인 ETF는 암호화폐 시스템에 접근하는데 진입 장벽이 있는 대다수 사람이 손쉽게 비트코인에 분산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다. 비트코인 반감기는 채굴량을 희소하게 하여 비트코인 가격이 상승하든지 채굴자가 채굴을 포기하든지 시장의 선택을 강요한다. 지금까지 시장은 채굴자가 채굴 포기해 비트코인이 와해된 것이 아니라 희소성에 따라 급격한 가격 상승을 선택해 왔다.
내 생각에 3년 이내 비트코인의 본격적인 가격 상승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이유가 비트코인 ETF, 혹은 비트코인 반감기는 아닐 것이다. 이 호재는 그저 비트코인이 대중화되거나 희소하게 만들어 간접적 도움을 줄 뿐이다.
본격적인 비트코인의 대중화와 가격 상승은 임박한 달러 기반 명목화폐 시스템의 실패와 궤를 같이할 것이다. 그 실패 시나리오는 다양하나 양상은 비슷하다. 결국 빚으로 쌓아온 모래성이 어딘가에서 붕괴하면서 실물 경제가 파탄 나고, 화폐 가치는 널뛰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명목화폐의 신뢰가 크게 떨어지는 것이고,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미국을 비롯해 각국이 화폐 개혁을 통해 기존 부채를 강제로 탕감하는 것이다.
이 첫 번째 단계가 인플레이션이 꺾이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 한정해 이야기해 보자. 미국의 최근 발표된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엄청나다. 고용도 견조하다. 물가는 아직 기준금리를 상회한다. 연준이 금리를 인하하기는커녕 한 번 이상 금리를 올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상황이다. 이와 반대로 재정지출 계속 늘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를 매수해야 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도 전쟁에 휘말렸다. 이들을 재정-군사적으로 돕는 게 공짜로 되지 않는다.
즉, 중앙은행이 돈줄을 죄는데 정부는 돈을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전형적인 아랫돌 빼서 윗돌에 올리는 짓이다. 이 상황에서 물가는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중동이나 우크라이나 정세가 불안해져 유가나 식량 가격이 급등이라도 하면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그렇다고 경기가 좋은 것도 아니다. 즉, 전 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망령에 사로잡혔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전 세계적 폭탄 돌리기가 끝나고 어디선가 폭탄이 터지면 끝난다. 일본의 국채, 중국과 한국의 부동산, 미국의 파생상품, 유럽의 은행, 예상치 못한 지정학적 충돌, 등 본격적인 경제 공황이 닥치면 일단 물가는 잡히지만 경제는 대공황급의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다음이 중요하다. 대공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지금 시스템에서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돈을 무한대로 찍어내는 것이다. 이 순간이 결정적이다. 결국 국가가 위기에 할 수 있는 게 돈 푸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이 폭로되는 시점이다. 명목화폐는 천천히 진행되는 폰지사기다.
비트코인은 '사이퍼펑크(cypher punk)' 문화에 바탕을 둔다. 이들은 기술에 기반한 무정부주의를 추구하는 괴짜들이었다. 괴짜였지만 그들의 통찰은 진짜다. 그 통찰은 "화폐는 정부가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꿈꾼 것은 인류가 공유하는 화폐다. 그게 비트코인이다. 이제 곧 ETF로 편하게 투자할 수 있는 자산도 아니고, 한탕을 노리기 좋은 투기적 자산도 아니다.
인류가 공유하는 화폐가 되려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근대적 국민국가다. 국경 안의 교육, 치안, 행정을 독점하다 못해 국경 내 모든 사람을 민족(nation)으로 개조할 능력도 있는, 산업화 이후 성립된 국가 말이다.
국민국가는 강력하다. 현재 국제 질서는 국민국가의 절대성을 기반으로 짜여 있다. 주권은 침해할 수 없고, 힘에 의한 영토 변경도 금지되며, 국가는 자국민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자국민에 대한 통제력은 그들이 사용하는 화폐를 하나로 제한하는 것을 포함한다. 근대 국민국가의 절대성이 강한 곳에서 비트코인은 그저 괴상한 자산을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국제 질서를 상상해 보자. 너무 크게 보지 말고 동북아 3국만으로 한정해 보자.
- 한국, 일본, 중국 사이에 비자가 면제되는 것은 물론 상대국 방문에 여권도 필요 없다. 상대국에서 장기 거주도 크게 제한받지 않는다.
- 3국 기업 사이에 관세도 없고, 검역과 인증 절차와 같은 비관세 장벽도 최소화한다
- 개인이 자국의 화폐를 다른 나라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즉 한국의 가게에서 엔화와 위안화도 받을 수 있다.
- 인프라와 규격이 호환되고, 국경을 넘는 취업과 대학 진학도 일상화된다.
위와 같은 세상이 지옥이겠는가? 아니다. 반드시 더 큰 시장과 더 큰 공동의 번영을 가져온다. 물론 피해의식이 발동하여 "한국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개방도와 자유도가 높아진 사회는 항상 더 번영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국민국가의 절대성은 줄어든다. 국가와 자국 문화는 국민의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점점 공동의 정체성과 더 보편적인 가치관에 동의하는 국제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하다, 일본에서 은퇴한 사람이 한 나라에 광신적 충성심을 보일 리 없다.
위 가정을 더 많은 나라로 확장해 보라. 위와 같은 세상은 개인의 충성심과 소속감이 좁은 한 나라의 국경에 갇혀있지 않은 사람의 수를 늘려가다, 결국 새로운 국제 문화에 충성하는 인류를 만들어 낼 것이다. 지금도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있지만 한 줌도 안 된다. 이들이 국민국가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현재로선 무리다.
산업 혁명이 근대화를 끌어내고, 근대화가 지금 형태의 국민국가와 국제질서를 만들었다. 따라서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제질서는 산업혁명 수준의 새로운 산업과 기술이 만들어 낼 것이다. 새로운 산업과 기술이 기존의 체제와 인식을 영구히 바꾸는 순간이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순간이다.
그 기술의 핵심 첫 번째는 '언어'다. 결국 국민국가는 독자적 문화에 기반해 있고, 그 뿌리는 언어다. 만약 세계에 언어가 하나만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국가는 있을 수 없었다. 언어적 단절을 약화할 기술은 그런 의미에서 국제주의 확산의 핵심이다. 이런 기술은 이미 상용화하고 있다. 외국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번역해 주는 기술은 이미 나왔고, 자국어로 즉시 더빙해 주는 기술도 상용화 직전이다. 이 기술은 단기간 안에 자동 통역 기술로 발전할 것이다. AI, Machine learning 기술로 이 기술은 대단히 정교하고 정확해질 것이다. 이제 상대국 고도 문화와 문학을 심도 깊게 이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주산을 배우는 것과 같이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이 된다. 이게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기술이 대중화됐을 때, 사람들은 그저 편리한 게 하나 더 나타났다고 가볍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이 인간 사회에 미칠 영향은 그리 가볍지 않다.
두 번째는 정보-통신-연산 기술이다. 너무 많이 이야기된, 뻔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AI가 기업에서 중간 관리자는 물론 상당수의 단순 업무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정교한 범용 로봇이 단순 육체노동을 대부분 대체해 버렸을 때 사회가 받을 충격을 예단할 수 없다. 산업과 사회에 사람이 훨씬 덜 필요한 세상에서 여러 사회는 붕괴 과정을 겪는다. 붕괴 전까지는 국수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가 팽배할 것이다. 극심한 혼란과 전쟁이 뒤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소통하고 의사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이들에게 국민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이전 시대의 야만성을 상기하게 하는 무언가로 느껴질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스타링크 기술의 군사적 능력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앞으로 최첨단 기술을 전쟁에, 즉 국가의 존립에 활용하는 것조차 이런 기술 기업에 달려 있다. 안보의 외주화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사이버펑크 2077 세계관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첨단 기술과 데이터를 독과점한 기업의 영향력이 커진다고 봐야 한다. 안보 문제가 이렇다면 다른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다국적기업이라 불리던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국민국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힘과 기술을 가진 존재가 권력도 갖는다. 장기적으로 기술 기반 거대기업의 영향력은 계속 커진다고 봐야 한다.
마지막은 국가에 검열 저항을 가진 화폐다. 바로 암호화폐다. 국제주의 시대에는 국제주의적 화폐가 필요하다. 특정 국가의 영향에서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가치가 잘 보전되며,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화폐 말이다.
비트코인은 태어날 때부터 국제주의적이었다. 그 본질상 국가의 국경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비트코인은 국제주의적 사고방식 아래서만 번영할 수 있다. 비트코인은 부당한 국가의 압력을 받으면 그 국가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인간, 기회를 쫓아 자기 문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에게 맞는 화폐다. 국민국가의 선전-선동, 억압을 넘어 사고할 수 있는 인간, 명목화폐의 기만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인간에게 맞는 화폐다.
지금까지 이런 인물은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업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이동은 더 편리해지고, 의사소통은 편해진다. 국가를 넘어서 활동하는 경제적 실체가 힘을 갖고, 개인의 선택권이 넓어진다. 이런 환경 변화는 국제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의 수를 극적으로 늘린다. 이런 세계에서 암호화폐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만 산업혁명을 넘어서는 문명의 도약과 인식의 확장이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이다. 중세 농민이 지금의 기술과 인식의 변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렇듯 다시 한번 도약한 후의 인류의 기술과 인식의 확장은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리라 확신한다.
이 모든 일 이후에 인류는 지금 시대를 산업혁명 초기처럼 야만과 무지의 시대로 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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