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상급 종합병원 의사 중 전공의 비율은 40%에 육박한다. 전공의가 사실상 배우고 수련하는 처지라는 점을 볼 때, 비상식적으로 높은 비율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자. 일본 도쿄대 부속병원의 전공의 비율은 10.2%, 미국 메이요 클리닉의 전공의 비율은 10.9%다.
현재 전공의의 법정 근무시간은 주 80시간이다. 이것도 말도 안 되지만, 실제로 80시간만 일하는 대한민국 전공의는 없다. 사실상 한국 대형 병원은 전공의를 갈아 넣어 유지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왜 한국 병원만 누군가를 갈아 넣어야 하는 걸까? 간단하다. 건강보험제도가 중요한 기초 의료행위를 할수록 병원이 손해를 보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병원은 암 환자를 수술하면 손해를 본다. 이걸 부인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암 환자를 수술해서 손해 본 돈을 장례식장과 식당, 주차장을 운영하여 메꾼다. 그리고 인건비는 최소로 해야 한다. 한국의 상급 종합병원이 전공의를 무지막지하게 뽑아 굴리는 이유, 간호사와 의료 보조인력이 부족한 이유다. 참고로, 윤석열이 말하는 의료계혁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진지한 노력은 없다.
2. 그럼 상급 종합병원의 수준은 어떤가? 2024년 뉴스위크가 정한 세계 우수병원에 따르면, 서울 아산병원이 22위, 삼성 서울병원이 34위, 세브란스병원이 40위다. 서울대병원이 43위고, 대부분 대형 대학병원이 250위 안에 순위를 올렸다. 즉 한국의 대형 병원은 상당히 우수하다.
한국 의료시스템의 막강한 가성비와 신속성, 효율성은 국뽕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로 인한 한국의 양호한 보건-의료 상황은 OECD 보건 통계에도 나타난다. 한국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전반적인 국민의 보건-의료를 훌륭하게 관리하고 있다.
3. 그럼 이제 윤곽이 보일 것이다. 전공의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병원이 어떻게 세계 유수의 병원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한국 의료가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유지될 수 있었는지 말이다. 당신이 당연하다는 듯 누렸던 양질의 의료 서비스는 의사, 특히 전공의를 갈아 넣어서 유지되던 것이다. 암 환자나 중증질환자가 이렇게 신속하게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나라는 단언컨대 없다. 수십만 원에 중증질환의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나라도 전 세계에 없다. 이 모든 일에 전공의들의 피, 땀이 어린 노력이 묻어 있다.
간호사나 PA에게 전공의가 하던 일을 다 할 수 있게 하더라도 지금 전공의를 대체할 수 없다. 어떤 골 빈 간호사나 PA도 전공의가 받는 급여로 100시간 넘게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4. 그럼 전공의들은 바보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물론 수련이라는 극한의 과정을 겪어서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의료계의 문화(혹은 악습)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자부심과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보수가 낮더라도, 대단히 전문적인 분야에 몰두하여 살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인 사람이 반드시 있다. 사실 기초 의료에 종사하는 교수들도 대부분 이런 오타쿠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교수라는 위신과 명예가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없다.
최근 수년간 일어난 일은 이렇게 희생에 가까운 노력을 하던 사람들을 위협하고, 의심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이게 윤석열이 의사들을 때려서 총선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유다. 의사에 대한 대중들의 저급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자극하면 자기는 영웅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으리라.
5. 난 이전 글에서 윤석열이 선거전략으로 쉽게 생각한 2,000명 의대 정원 확대가 자기 뜻대로 풀릴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는 실제로 의대 정원이 2,000명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윤석열과 여당이 의사를 때려서 총선에서 이득을 볼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렇다. 이런 말을 다시 하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이제, 윤석열이 석고대죄하면서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해도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윤석열이 물구나무서서 그랜절로 사죄하더라도 한국 의료체계에서 가장 소외받으면서 멸시받았던 전공의들 대부분은 병원에 복귀하지 않는다. 이게 이 글의 요점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필수 의료에 종사하는 전공의일수록, 수련 연차가 낮을수록 아예 수련을 포기한다. 지금 사직서를 제출한 12,000명의 전공의 중 대략 7,000명 이상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본다. 정부와 여당이 살살거리며 협의체 결성을 요구하고, 대학 교수들이 자기들 전공의를 지키겠다고 사표를 쓰는 마당에도 말 한마디 없이 잠수타는 이유다. 이들은 자기를 가르치던 교수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만큼 정부, 사회, 의료계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 크다.
이들이 정부에 느끼는 것은 분노도 아니다. 경멸이다. 자기를 화나게 한 상대와는 대화할 수 있어도 경멸하는 인간과 대화하기는 훨씬 힘들다. 아마 전공의들이 현 정부를 협상 파트너로 인정할 가능성은 낮다. 이들은 그냥 정부와 상대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게 바로 서늘한 분노다.
6. 교수들 중, 전임의(펠로우)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전에 말했듯, 전임의는 대학교수에게 붙잡힌 대학원생과 비슷한 면이 있다. 기회만 되면 도망가고 싶었는데 현 상황이 도망갈 명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교수직에 도전하려는 야심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 기초의학 교수직도 3D업종이나 마찬가지다. 위험은 크고, 보수는 적고, 사회적 존경도 받지 못하는 자리 말이다. 교수직을 노리는 야심찬 전임의도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7. 의대생은 어떨까? 이들이 단순히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 휴학계를 제출했으리라 보는 것은 상황을 잘못 본 것이다. 이들 대부분, 특히 남학생은 진심으로 지금 군대에 가고 싶어 한다. 39개월씩 공보의나 군의관에 잡혀 있으면서 정부의 명령에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것보다, 휴대폰도 보고 자기 계발도 하면서 18개월의 군 생활을 보내고 싶어 한다.
이들이 앞으로 기초의학 전공의가 될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 기초의학에 종사하는 전공의는 물론이고, 교수들이 어떻게 뺑뺑이치면서, 법정 분쟁을 두려워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지 다 봤다. 이는 아무리 오타쿠적 기질이 있더라도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이들이 선택하고 싶어도 주변과 가족들이 뜯어말릴 것이다.
8. 결론은 이렇다. 윤석열은, 이제 비밀도 아닌 저급한 식견과 낮은 이해력에 기반한 독선과 아집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의료계를 산산이 부셔 버렸다. "산산이 부셔 버렸다"는 표현이 과장이거나 수사적인 표현이라고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그 말 그대로, 한국의 의료는 비가역적으로 파괴되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회제도가 이렇게 신속하게 파괴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올해 안에 대형 수련병원 전부가 파산의 길로 간다. 만약 정부가 이를 막으려면 수십조 이상의 돈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간신히 파산을 막더라도, 이제부터는 공보의를 갈아 넣어 병원을 운영할 수 없게 된다. 기초 의료를 담당할 3~4차 의사는 심각하게 모자란다. 이미 말했지만 앞으로 의대생이 기초 의학을 수련할 결심을 하기 힘들다. 이 두 문제가 맞물려 상급 종합병원은 물론, 기초 핵심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는 급격히 줄어들고, 대형 병원의 운영은 급격히 악화된다. 수만 명이 여기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단 한 인물의 무지와 아집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이다. 한국은 북한, 중국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는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윤석열이 나중에 그랜절이라도 하면서 협상을 통해 모든 일을 처음으로 되돌리려 해도, 이는 불가능하다. 우선 누구와 협상하겠다는 말인가? 주동자를 찾겠다고 전 의협회장까지 수사로 겁박하지 않았는가? 누가 주동자가 되어 정부와 협상하고 싶겠는가? 지금 의료계를 대표하는 전공의협의체, 의사협회, 교수협회는 모두 윤석열을 정상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빼면 이해관계도 다르고 공통의 구심점을 만들기도 힘들다. 즉, 누구도 대표권을 위임받아 정부와 협상하기 힘들다. 특히 전공의들은 기존 의사협회나 교수단체도 기득권으로 보기 때문에 순순히 이들을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벌집을 건드린 후 누가 벌들과 협상할 수 있겠는가? 윤석열은 벌집을 잘못 건드렸다.
9. 그럼 앞으로 한국 의료는 어떻게 되는가? 의사들도 알고, 보험회사도 알고, 정부도 대충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다. 바로 총액제다. 사실상 대부분 OECD 국가에서 하는 제도다.
총액제 의료보험제도는 대략 이렇다. 의사 A와 국가(혹은 건강보험공단)는 1년에 B~Z까지 환자 25명을 포괄적으로 돌보는 것을 2억 원에 계약한다. 그럼 의사 A는 2억을 받고 이들 환자를 치료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량을 넘는 치료는 상급 의료기관에 의뢰한다.
이 제도의 약점이 보이는가? 그렇다. 의사는 일단 돈을 받았지만 25명에게 들어가는 돈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정부에서 받은 돈과 환자 치료에 들어간 돈의 차액이 자신의 소득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일한다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니 일 년에 휴가는 30일씩 간다. 휴일은 물론 근무시간은 최대한 줄인다. 비용이 많이 들거나 난이도가 높은 치료는 회피한다. 하루에 볼 환자는 최대한 적게 하고 예약은 어렵게 한다. 조금만 까다로운 환자가 있어도 바로 상급 의료기관으로 의뢰해 버린다. 총액제 하에서 의사는 이렇게 할 동기를 갖는다.
이게 선진국에서 의사를 보려면 한 달씩 기다려야 하는 이유다. 암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 1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영국 환자가 치과 진료를 받으러 우크라이나에 가는 웃지 못할 이유기도 하다.
이게 대한민국의 미래다. 이 길을 이제 피할 수 없다. 정부도 현 건강보험제도의 틀을 유지할 수 없다. 건강보험을 막대하게 올리던지 총액제로 가던지 선택해야 하는데, 정부 특성상 건강보험을 소득의 15~20%까지 올릴 수 없다. 예전에는 의사를 쥐어짜 어떻게든 했는데 이제 젊은 의사들이 모두 탈출해 버렸다.
그리고, 건강보험제도의 당연지정제를 폐지할 것이다. 즉, 의사는 국가와 총액제 계약을 맺던지, 아니면 다른 사보험사와 계약을 맺을지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와 총액제 계약을 하지 않고 삼성생명과 진료별 수가 계약을 할 수 있다.
결국 국가가 운영하는 총액제 의료보험은 서민들만 이용하고, 암 수술을 1년씩 기다리거나, 전쟁하는 나라로 원정 치과치료를 가기 싫은 사람은 사보험을 이용할 것이다. 이 제도가 일단 시작하면 국가에 강제로 가입하는 건강보험도 사라지는 게 시간문제다. 나는 삼성생명의 의료보험을 이용하는데 왜 국가에 건강보험을 지불해야 하는가?
이제 경제력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질이 확 달라지는 세상이 온다. 사실 윤석열과 대중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OECD 국가 의료 현실이 이렇다. 한국이 그동안 예외적이었던 것이다.
10. 위에 말했던 음울하지만 가능성 높은 가능성을 피할 길은 없었을까? 있었다. 건강보험이 소득의 10%까지 갈 수 있다는 현실을 국민에게 잘 설명하고, 건강보험공단과 심평원과 같은 관리기관을 효율화하고, 선심성으로 지불되는 건강보험 재정은 줄이고, 가벼운 질환에 대한 본인부담금은 대폭 늘리고, 의사를 늘리고, 한의사는 없애던지 한방 의료에 건강보험을 지불하는 것을 폐지하고, 약사의 권한을 축소하여 불필요한 건강보험 급여를 줄이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걸 못한다고, 포기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마음은 없다.
윤석열은 이 모든 과제를 뒤로 하고 의대 2,000명 증원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충격요법을 시행했다. 의사를 악마화하고, 전공의들을 범죄자 취급했다. 난 이렇게 저급하고 무대뽀로 행동하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11. 의사는 악마화하고 싶으면 해라. 사람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열등감을 치유하려 하거나, 무너진 자존감을 채우려 한다. 비천하지만 재미있는 게 또 마녀사냥 아닌가? 까짓거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철없어 보일 정도로 순진한 희망을 품고 기초 의학에 종사하는 전공의들은 왜 욕했는가? 주 100시간 넘게 일하며 대한민국 의료를 사실상 떠받친 전공의들은 왜 욕했는가? 이들은 노예 노동에 가까운 직업을 버릴 권리도 없었단 말인가? 난 윤석열 못지않게 전공의들에게 돌을 던진 무지한 대중들에게 분노한다.
한편 이런 무지한 인간들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못 배우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고, 피해의식이 있는 인간들이다. 앞으로 파국이 될 의료 체제에서 가장 피해를 입을 자들이다. 암에 걸려서 수술을 1년 넘게 기다릴 때, 폐렴이 걸렸는데 의사 예약이 한 달 뒤에 잡혔을 때, 간신히 본 의사도 괜찮다고 집에서 쉬라고 하거나 6개월 더 대기해야 하는 전문의에게 의뢰해 버렸을 때, 자신들이 누구를 욕했고, 누구를 칭찬했는지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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