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소리가 난 것인가?
아주 유명한 명제다. 저자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한다. 그에게 소리는 “세계에서 발견되는 사태가 아니라 공기 압력의 변화를 발견하는 신체와 이런 변화에 의미를 구성하는 뇌가 세계와 상호작용할 때 구성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듣기에 그럴듯해 보이지만, 나로서는 주로 실존주의자 문과충들이 하는 가치 없는 궤변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실체라는 생각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다. 아무리 좋게 봐도 인간 중심적이다. 소리는 분명히 세계에 존재하는 사태다. 매질을 이동하는 종파이고, 각자 독특한 주파수, 진폭을 갖는다. 이런 물리적 현실을 이용한 것이 동물의 감각기관이다. 물리적 현실이 인간의 감각기관이 없으면 실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기이한 망상이다.
여기에 저자와 이 책의 문제점이 있다. 탄탄한 사실관계와 증거에서 주장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에 세상을 꿰맞추려 한다. 사람이 없으면 물리적 현실이 없다고 보는 사람이 할만한 일이다.
사실 저자의 주장이 완전히 과학적 증거가 결여된 것은 아니다. 나름 타당한 근거에 기반해 자기 모델을 구성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구성된 감정 이론”은 “본질주의적 감정 이론”을 비판한다. 인간의 신체, 뇌에 감정과 관련된 구분할 수 있는 “지문”이 있어서 이를 확인하여 감정도 확인할 수 있다는 식의 모든 이론이다. 예를 들면 편도체를 공포 반응의 중추로 보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감정은 문화적 산물이다. 즉, 문화와 사회가 없으면 극단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감정은 없는 것이다. 몸의 모든 감각에 대한 뇌의 평가를 정동(affect)이라고 한다. 이 정동은 감정의 중요한 구성 재료다. 감정은 문화와 언어를 통해 구체화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감정은 감정 개념이 된다. 구역질, 갈망, 불안, 등의 경험에서 당신 뇌에 작동하는 개념은 일종의 감정 개념이다. 당신 내수용이 느낀 감각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당신 주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해 당신의 신체 감각이 의미하는 바를 당신의 뇌가 구성하는 것이 바로 감정이다. 즉, 감정 개념은 사회적 실재로 문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뇌에 깔리는 소프트웨어와 비슷하다. 즉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뇌에 존재하는 회로가 아니다. 외부의 사태에 의해 촉발되는 어떤 상황도 아니다. 당신이 즉각적으로 적절한 감정 개념을 이용해 구성해낸 것이다.
알쏭달쏭하지만 실제 과학적 근거를 볼 때 타당한 면이 있는 주장이다. 근거는 당신의 뇌가 정보를 받아들여 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당신 뇌에는 세상과 당신 신체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끊임없이 돌리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외부 감각은 이 시뮬레이션을 수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만약 감각을 끊임없이 평가해서 행동한다면 당신은 절대 운전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운전할 도로와 자신의 차, 운전 경험을 통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운전하고, 외부의 중요한 정보를 감각으로 이를 보정한다고 보는 게 경험칙에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이론이 타당한 것과 자신의 이론이 진실인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책과 저자는 자신의 개념을 진실이라고 간주하고 경직된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이론이 현실과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다. 게다가 저자가 부정할지라도, 저자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식 진보주의 관점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려는 시도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런 종류의 구성주의 세계관이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뜻에서 전형적으로 과도한 동정심을 드러내는 진보주의 상아탑 학자의 견해라고 배척할지 모른다. 실제로 이 견해는 전통적인 정치 노선들을 가로지르고 있다. 당신이 문화에 의해 조형되었다는 견해는 전형적으로 진보적인 것이다. P.522
축적된 관찰 결과에서 타당한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관에 맞는 답을 정해놓고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저자는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는 물론, 개에게도 감정은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이 인간과 같은 뚜렷한 문화, 특히 언어가 없으므로 정동에서 감정 개념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문화와 언어가 없으면 감정이 없는데, 동물은 문화도, 언어도 없으므로 동물은 감정이 없다는 말이다. 강아지가 질투하고, 화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심리 추정의 오류’다. 그냥 감정처럼 보일지라도 실제 감정은 아니라는 말이다. 개를 한 번이라도 키워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이다. 동물이 너무나도 뚜렷이 감정처럼 보일지라도 감정이 아니라면 내가 다른 사람이 감정을 가진 것은 어떻게 확신하는가?
언어가 사회-문화적 실재(實在)라 사회와 문화가 없다면 감정도 없다는 생각은 다양한 동물(개와 영장류를 포함하여)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조차 간과한다. 아마 저자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일지 모른다. "동물은 인간과 비슷한 정동(쾌-불쾌, 흥분-안정)을 느낄지는 몰라도 언어나 사회적 의미로 구체화된 정확한 감정의 개념은 없다." 이는 감정을 포함하여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사회-문화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려다 궤변에 이른 것이다.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면, 즉 인간과 같은 사회-문화-언어가 없어도 감정이 있다면 저자가 말하는 '감정을 구성하는데 필요조건으로서 문화'는 반박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개와 침팬지는 모성애도 없어야 한다. 자식을 돌보는 본능이 모성애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심리 추정의 오류'일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모성애도 감정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저자는 선을 그을 수 없는 것에 선을 긋는다.
진실은 극단의 중간 어딘가일 것이다. 저자가 직접 말한 대로, "내수용이 느낀 감각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주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해 신체 감각이 의미하는 바를 당신의 뇌가 구성하는 것"이 감정이라면 동물이라고 생존에 거의 필수적으로 보이는(특히 사회적 동물에) 감정이 없을 리 없다. 인간의 언어로 구체화된 정밀한 감정의 개념은 없더라도 말이다. 침팬지가 샤덴프로이데(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감정으로, 죄책감과 사회적 부적절성에 대한 당혹감도 포함한 독일어)를 느끼는지는 몰라도 기쁨, 슬픔, 분노, 애정, 질투 같은 굵은 '감정 입자도'의 감정은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감정은 인간과 같은 고도의 문화가 있어야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보편적으로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기본적인 도구다. 이 도구가 유전자에서 자발적으로 발현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저자의 주장 중에는 훌륭한 부분도 있다. 여러 질병, 특히 만성 통증과 불면증, 우울증과 같은 질환을 모델에 따라 설명하거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원칙은 새겨들을만하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책이 제시하는 감정 모델에서 시사점을 얻길 바라지만, 저자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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