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말하는 ‘민족’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다. 제한되었다고 함은 민족에는 일정한 경계가 있다는 뜻이고, 주권을 가진다고 함은 왕조 혈통의 정당성이나 종교적 신비가 아닌 민족 자체를 주권의 실체로 본다는 뜻이다. 상상되었다는 것은 특정 경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에 추상적인 유대감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이 책에서 천착하는 주제는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해졌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에 주목한다. 근대화와 함께 점점 고도화된 인쇄기술과 상업의 결합은 점점 라틴어가 아닌 지방의 언어(방언)로 된 인쇄물을 늘린다. 이는 각 지역 언어로 독해하는 독자를 늘린다. 그리고 지역 언어로 쓰인 문학이 번성하게 된다. 결국, 그 지역을 담당하는 권력은 행정적 편의를 위해 행정 언어이자 문자로 라틴어가 아니라 그 지역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자기 회귀적으로 그 지역 방언을 활자 어로 격상시키고, 같은 언어와 활자 어를 공유하는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 공동의 역사와 문화, 운명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상상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민족은 인쇄 매체가 가능하게 한 특수한 종류의 상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허위의식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적 산물이다.
위에 말했듯, 저자는 ‘상상’된 것이라 해도 민족주의를 허구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민족주의는 그 구성원에게 실재(實在)로 경험된다. 저자는 이를 배타적이거나 종족적, 인종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것은 민족주의 이전 전근대 사회의 특성으로 본다. 전반적으로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에는 따듯함이 묻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민족주의를 이야기할 때, 이 책과 병독 해서 읽으면 시너지를 내는 책이 있다. 어니스트 겔너의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책이다. 우연인지, 그 시대의 치열한 논쟁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두 책은 1983년 같은 해에 발간됐다.
어니스트 겔너에 의하자면, 민족주의는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한다는 정치적 원리”이다. 앤더슨이 민족주의를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어니스트 겔너는 인류학-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두 책의 접근 방식은 꽤 다르다. 전자는 민족주의를 인쇄자본주의가 촉발한 문화 현상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본다. 후자는 민족주의를 근대민족국가에 의해 도구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전자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구성되었지만, 실체가 있는 것이고, 후자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근대민족국가가 사회적 필요 때문에 발명한 것이다. 전자는 상상된 공동체의 원형으로서 신대륙, 특히 남아메리카를 주목하고, 후자는 근대화된 중앙과 그 변방으로서 프랑스와 중부유럽에 주목한다.
두 저자의 차이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앤더슨은 주로 민족 공동체가 어떻게 상상되고 경험되는가를 설명하고, 겔너는 민족주의가 어떤 사회 구조적 조건에서 등장하고 작동하는가를 설명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접근법과 강조점,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가 동의하는 부분이 꽤 많다. 같은 산을 다른 경로로 오른 것과 비슷하다.
-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이다. 민족주의는 18~19세기 이후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출현한 근대적 현상이며, 그 이전의 종족적·문화적 집단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민족이 경험한 역사의 영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강조되는 수천 년 민족의 역사, 전근대 사회와의 연결성은 다분히 민족이 날조한 신화에 가깝다.
- 민족주의는 근대산업사회의 정당화 논리다. 민족주의는 근대사회의 요구에 부응해 전근대의 종교적·왕조적 정당성 체계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공백을 채웠다. 민족주의는 세속화와 근대화가 만들어낸 의미론적 공백의 산물이다.
-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든다. 민족이 존재한 다음에 그 공동의 인식에서 민족주의가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는 직관에 반하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실이다. 민족은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다.
-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구성된 실재다. 두 저자 모두 민족 정체성이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의도적·정치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겔너에게 이 과정의 주체는 국가와 교육 시스템이고, 앤더슨에게는 인쇄 매체와 지식인 집단이다. 이 과정에서 엘리트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일단 형성된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실재 힘을 발휘한다.
반만년의 역사, 단일한 혈통, 같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온 역사를 공유하는 것으로 상상되는 한국인에게 상당히 거북스러운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위 저자들의 말이 과학적으로 타당하고 조리에 맞는다는 것을 인정 안 할 수 없다. 한민족은 상상된 것이다. 심지어 18, 19세기가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상상된 것이다. 이 상상이 한국인에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지, 일본이 nation이란 단어를 번역한 민족(民族)이라는 용어는 그 혈통과 역사성에 대한 상상을 통해 국민(國民)이라는 단어와 거의 결별했다. Nationalism은 이렇게 한국에서 범주와 감정적 울림이 다른 민족과 국민 두 용어로 분화했다. 전자는 실재하는 역사-언어-전통-혈통의 공동체라면, 후자는 그저 한국인으로 태어났거나 귀화한 사람을 이르는 행정용어에 가깝다. 내 생각에, 한국에서의 민족이라는 용어는 어쩌면 국가를 넘어선 상상 속에 주권의 실재일지도 모른다.
민족이 근대적 조건에 의해 구성되었든, 국민국가에 의해 창조되었든 간에, 한국이 이 정도로 발전하는데 민족주의가 끌어낸 헌신과 응집력, 상상력이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 자아에 완전히 들러붙은 정당화 이데올로기는 인간 근원의 자유와 판단을 저해한다. 우리는 종교적 이유로 군대에서 총을 잡는 것을 거부하거나 수혈을 거부하는 특정 종교인에 거부감을 느낀다. 종교나 기타 집단에 대한 충성을 민족에 대한 충성에 우선하는 사람도 혐오한다. 우리는 이를 자연스럽고 인간 본성에 맞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다. 하지만 이 거부감의 근원이 보통교육과 매체에 의해 우리에게 주입된,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자아와 합체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20세기 초반에 ‘상상’되거나 ‘창조’된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고 인간 본성에 맞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숙고와 고찰을 통해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근대 정당화 이데올로기였던 종교를 대체한, 근대가 발명한 종교인 민족주의에 대해 조금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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