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신속하게 제압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도네츠크 방면과 크림반도 방면에서 그나마 성과를 보이지만 여러 전선에서 우크라이나의 집요한 반격을 받아 지속해서 출혈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국 언론에 노출되는 전황의 상당 부분은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이며 우크라이나에 유리하게 왜곡되거나 날조된 기사도 충분한 검증 없이 보도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전쟁 진행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러시아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우선 개전 8일차인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러시아의 상황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공군의 실종
현대 전쟁에서는 공격자가 개전과 동시에 압도적인 화력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어 상대국의 전쟁 지휘능력과 군사 역량을 최대한 와해하는 것이 상식이다. '충격과 공포'로 잘 알려진 이런 방식을 당연히 러시아도 사용하리라 예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비교적 단기간에 300발가량의 정밀유도무기를 사용한 후, 신속하게 준비한 병력을 투입했다. 러시아식 '충격과 공포' 작전에 러시아 공군이 적극적으로 참가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러시아 공군은 우크라이나의 제공권을 장악하려는 충분한 노력도 안 하고 있다. 이 덕분에 우크라이나 항공기는 제한적이지만 아직도 방공임무를 수행 중이고 러시아의 강습용 회전익 항공기와 지상군을 위협하고 있다. 이를 서방에서는 러시아 공군의 실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을 러시아 공군의 정밀 지상공격 무기 부족, 잠재적 대공 무기에 대한 경계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정밀 지상공격 무기가 없으면 재래식 무기를 사용해서라도 근접항공지원을 하고 군사 목표 타격을 해야 한다. 지상군이 곳곳에서 고정하고 있고, 심지어 우크라이나 공군이 강습 중인 회전익기를 공격하는 상황에서도 방공망이 무서워서 공군을 충분히 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이 공격 할까 봐 전진을 머뭇거리는 탱크와 마찬가지다. 이런 설명은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공군력을 투입 할 수 없는 어떤 기술적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참고로 30년 전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 항공기의 출격 횟수는 10.000회가 넘는다.
지리한 지상군의 움직임
크림반도 방면과 도네츠크 방면의 공세를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목표인 키예프와 하리코프 방면의 공세는 거의 멈춰있다. 키에프 주변 주요 공항을 장악하려는 러시아의 대규모 강습 작전이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좌절된 이후, 이틀간 중요한 교전은 없는 상태이다.
키예프 방향으로 대규모 병력 이동이 관찰되고 있다. 키예프에 대한 대규모 포위에 동원될듯한 이 병력은, 장장 60km가 넘는 이 행렬은 며칠째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전쟁 중에 이동 중인 병력이 도로에 60km 이상 늘어선 모습도 드문 일이지만,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현대전에서 보기 힘든 일일뿐더러 공중에서 공격을 당한다면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걸프전의 죽음의 고속도로에서 이라크군은 단 몇 시간 만에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잃은 장비보다 훨씬 많은 장비를 잃었다.
러시아의 공세 종말점인가? 아니면 인명피해를 두려워한 제한적 작전의 결과인가?
우크라이나 측의 여론전 정보를 제외하더라도 러시아에 축차 투입된 병력이 지리멸렬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과 제공권 장악에 충분한 공군력을 투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보급과 지휘가 원활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번에 러시아는 자국 지상군 전력의 상당수를 투입했다. 그럼에도 유럽의 약소국 하나를 제압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정도가 러시아의 실제 군사 역량이라면, 서구는 러시아의 재래식 전력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덩치 큰 북한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러시아가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를 얕잡아 보고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가 일시적으로 스탭이 꼬인 것일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망신을 당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르는 상황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겠다는 목표는 철회하고 며칠 내 키예프에 대규모 포격을 동반한 점령을 시도할 것이다.
결론
러시아의 남부와 동남부 전선은 비교적 작전 목표를 달성 중이다. 헤르손이 함락되었고, 마리우폴은 완전히 고립되어 함락이 불가피하다. 오데사에는 대규모 병력이 상륙을 준비중이다. 사실상 우크라이나는 해안에 접근하는 것이 차단된다.
이에 비해 북쪽에서 러시아의 공세는 지지부진하다. 이런 상황이 러시아가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라면 이번 전쟁은 상당히 장기화 될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시리아가 될 것이다.
만약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이 충분하여 군을 재정비해 다시 한번 공세를 재개한다면 키예프, 하리코프 등 주요도시는 러시아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벨라루스가 참전하여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을 차단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나토에서 완전히 고립된다. 사실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앞으로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혹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흑해에서 고립시키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할 것이라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우크라이나를 내륙국으로 만드는 국경 변경을 서방이나 우크라이나가 받아드릴 리도 없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협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혹자는 푸틴이 현실적으로 판단해 적당한 선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철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것 같지 않다. 푸틴은 개인적 허영심이나 국내 사정에 대한 출구 전략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아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푸틴은 러시아의 사활적 이익상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점에 승부를 건 것이다. 푸틴의 편집적인 사고인지와 상관 없이, 푸틴은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NATO나 EU에 가입할 가능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스스로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 길은 다음과 같은 경우 뿐이다. 1. 우크라이나가 사실상 항복하고 중립화, 비무장화 한다. 2. 푸틴이 실각하고 다음 친서방 정권이 우크라이나와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둘 중 하나가 망해야 전쟁이 끝난다.
이외에 푸틴이 전쟁 목적 달성이 불가능함을 스스로 깨닫고 적당히 전쟁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한다. 푸틴은 러시아가 디폴트에 빠지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 푸틴 마음 속에서 이번 전쟁의 목표가 러시아가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벌이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이미 러시아는 예전에 디폴트에 빠졌던 적이 있다. 지옥 같은 경제위기와 사회 혼란도 겪어 봤다. 서구가 러시아의 경제를 파괴하여 푸틴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만약 러시아 내부의 분열과 푸틴의 실각을 노린 것이라면 그럴수 있지만 북한에서 보듯, 장기간 집권하고 있는 권위주의 정부를 경제적 압박으로 실각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푸틴은 이번에 자신의 군사적 목표가 저지된다면 더 강력한 수단을 쓸 것이 확실하다. 이제 민간인 피해를 신경쓰지 않고 민간인 거주지역에도 무차별 포격을 할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서구가 노골적인 군사적 개입을 한다면 NATO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다. NATO를 위협할 수단은 이제 핵무기 밖에 없다.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인류는 쿠바 미사일 위기 못지 않게 핵무기가 사용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겪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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