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일시 소강상태에 있을 때 한 가지 큰 실책을 저지른다. 시칠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스파르타와의 소모적인 전쟁과 전염병의 피해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다. 아테네는 부족하거나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미지의 영역에 국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원정을 강행한다. 시칠리아의 도시국가가 스파르타를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시칠리아라는 거대한 땅에 대한 탐욕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 결과이다.
아테네는 초반에 승기를 잡았으나 곧 전선은 정체되었다. 정체된 전선에서 아테네가 심각한 출혈을 일으키자 기회를 이용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은 아테네 영향권인 앗티카 지역을 침공하고 시칠리아에도 원군을 보낸다. 결과적으로 아테네군은 시칠리아에서 괴멸되고 아테네는 돌이킬 수 없는 인적-물적 손실을 본다.
당시의 피해가 워낙 극심하여 아테네의 속국들이 아테네가 다음 해 여름을 못 넘기고 망할 것이라 판단했다. 에우보이아, 레스보스 같은 아테네의 핵심 동맹국이 아테네를 등졌다. 페르시아와 스파르타는 물론이고 아테네에 원한을 가진 여러 나라가 분주히 움직였다. 아테네는 멸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후 아테네는 어떻게 했을까? 멸망을 받아들였을까? 적대국과의 화친을 추구했을까? 아니다. 순순히 멸망을 받아들이는 패권국은 없다. 적당한 화친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국내의 모든 자원을 모조리 긁어모아 결사적인 반격을 시작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재 전황을 보자. 서방 입장에 친화적인 한국 언론의 속성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러시아가 애초에 원한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는 게 분명해 보인다. 러시아의 전쟁 수행능력은 이미 한참 전에 한계에 도달했다. 우크라이나는 여러 전선에서 러시아를 격퇴하는 것도 모자라 러시아 본토까지 공격하였다. 이런 러시아 본토 공격은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자주 일어날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우크라이나군이 강하고 러시아가 약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서방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다. 미국과 서방은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무기와 자원, 인력을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우크라이나군을 훈련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전쟁에 필요한 실시간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것도 명확해 보인다. 러시아 입장에서, 이미 미국과 서방과 전쟁 중이다.
러시아에 우크라이나는 아테네의 '시칠리아의 악몽'이 되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졸전으로, 러시아는 국가 존립을 위협받는 심각한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러시아는 심각한 병력 부족을 메꾸려고 캅카스산맥 아래쪽 러시아의 핵심 분쟁지역의 병력을 빼서 우크라이나로 보냈다. 바로 조지아의 남오세티야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지역이다.
조지아로부터 실효적 독립을 누리고 있는 남오세티야(위 그림 위쪽 파란 원)는 러시아의 편입을 시도하고 있다. 조지아는 이런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명백하게 말을 해 놨으니 남오세티야가 주민투표로 러시아 편입을 결정하면 실제 물리적으로 저지할 수밖에 없다. 남오세티야에 러시아군이 있고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이 살아 있었다면 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이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지역(아래쪽 원)은 더 심각하다. 아르메니아 편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해 주던 러시아 주둔군이 철수하자마자 아제르바이잔은 군사도발을 시작했다. 러시아가 이곳에 평소의 태세로 주둔하고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를 위해 우크라이나에 지원병을 보냈다. 러시아에 몇 남지 않은 우방일 뿐 아니라, 러시아가 주도한 안보 동맹인 CSTO의 멤버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가 무력화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는 캅카스산맥(붉은색 선) 남쪽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잃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이다. 캅카스산맥 남쪽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러시아의 사활적 이익이다.
중앙아시아 또한 러시아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이다. 이곳에서 영향력을 잃으면 경제적으로나 안보상으로나 러시아는 큰 위협을 받는다. CSTO라는 안보 동맹과 밀접한 경제협력을 통해 이곳에서 러시아는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카자흐스탄에서 색깔 혁명의 조짐이 보이자 무력으로 진압하기까지 했다. 최근 중앙아시아의 핵심 국가들이 러시아에서 이탈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가장 핵심이익이 걸린 곳인 카자흐스탄의 이탈이 가장 눈에 띈다. 다른 나라들도 눈치를 보고 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동부에 파병하여 평화유지를 하겠다고 나서던 나라들이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덫에 걸렸는데 빠져나올 뾰족한 수가 없다. 미국과 서방은 이 기회에 러시아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 러시아가 약점을 보이자 캅카스산맥 남쪽의 적들이 도전하고 있고, 중앙아시아의 동맹은 이탈하려 하고 있다. 시칠리아에서 패전한 후 아테네에서 일어난 일과 일치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 러시아는 실존적 위협을 받고 있다. 여기서 적당히 종전을 받아들이면 러시아 영토 이외에 모든 곳에서 영향력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캅카스 산맥 아래쪽에서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는 적과 더 안좋은 상황에서 다시 한번 전쟁을 할 것이 불보듯 뻔하다.
이전 글에서 러시아가 적당한 종전을 받아들이거나 푸틴이 실각하기보다,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우크라이나를 제압하려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화학무기가 사용될 것은 거의 확실하고, 심하면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유럽과 미국의 참전을 불러올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수십 년 뒤 역사는 우크라이나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케르키라', 혹은 '1차 세계대전의 사라예보'로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서구의 지도자가 왜 그리 멍청하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미국은 적당한 선에서 종전을 이끌어야 할 입장이다. 위에서 말한 위험을 미국이 모를 리 없다. 러시아가 적당히 물러나게 하는 것을 우크라이나도 원하는 듯 하다. 오히려 바이든은 푸틴을 도살자라 부르고, 러시아의 정권교체를 입에 담고, 전범으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미국은 조기 종전을 원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회생 불능으로 파괴되거나 푸틴이 권력을 잃을때 까지 밀어붙일 기세이다. 위험하고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심지어 감정적으로 보인다. 쥐도 물러날 곳이 없으면 고양이를 문다. 지금 미국이 몰아세우는 쥐는 핵무기 6,000개를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러시아는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재래식 군사력은 거의 파괴되었고, 외교-경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국가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의 영향권을 이탈할 것이고, 캅카스 남쪽에서도 영향력을 잃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러시아 영토 내에서 주권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궁박한 상황에 몰릴 것이다. 이런 러시아의 쇠퇴를 천천히, 부작용 없이 관리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맞는 이성적인 행동이다. 지금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되었듯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확전, 혹은 3차 세계대전이 극동으로 옮겨붙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여기에는 중국, 북한, 한국, 일본의 결정이 영향을 끼칠 것이다. 중국이 적당히 중립적인 척 하고, 한국과 일본이 적당히 미국편인 척 하고, 북한이 그냥 가만히 있어 준다면 앞으로 심각하게 파괴되어 영향력을 잃게 될 서방을 대체하여 극동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그렇듯 모든 게 좋게 풀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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