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개월 전에 러시아가 처한 상황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시칠리아 침공을 실패한 아테네와 유사하다는 요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역사가 반복하듯 러시아도 이전 아테네의 길을 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소모전에 휘말렸다. 러시아는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능력이 없고, 그렇다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할 명분과 의지도 없다. 이런 상황 때문에 러시아는 사활적 이익이 걸린 캅카스산맥 남쪽과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급격하게 잃고 있다. 러시아는 이런 현실을 러시아가 그대로 받아들일 리 없으며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할 것이다. 이런 시도 과정에서 유럽으로 확전될 가능성과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일견 황당하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5개월 후 위와 같은 예상은 맞아들어가고 있다. 최근 캅카스 산맥 아래 조지아는 사실상 러시아 보호지역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하고 있고, 아제르바이잔은 그나마 캅카스산맥 남쪽의 유일한 친러국가 아르메니아와 다시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에 영향력 아래에 있던 공화국끼리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모두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잃고 있다는 신호이다.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잃는 것은 러시아가 용인할 수 없다. 단순히 위신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영향력을 잃으면 러시아의 존립이 달린 사활적 이익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애초 우크라이나를 무리하게 침공한 이유가 이런 '국가 존립과 연관된 사활적 이익'이 달렸기 때문이다.
며칠 전 결국 러시아는 부분 동원을 시작했다. 현 상황을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30만 명을 동원하는 것이 목표라지만, 군인의 절대적인 수는 그렇다 해도, 러시아가 전쟁에 필요한 충분한 장비를 생산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징집한 사람들을 적절히 교육하고 무장시킬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당연히 우크라이나에서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현재 러시아는 남쪽에선 드네프르강 하류, 북쪽에서는 오스킬강을 자연 방벽으로 방어전을 펴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강 뒤편으로 쫓아낸 것이다. 러시아는 체면을 완전히 구겼을 뿐 아니라 군사적 평판도 상당히 잃었다. 이런 역량이 단순히 우크라이나의 것일 리 없다. 미국과 서방은 막대한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을 넘어,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정보를 제공하고 작전계획의 입안과 실행까지 지원 하고 있다. 이제 이런 사실을 숨기려하지도 않는다. 미국과 서방이 단순히 의용병으로 참전하는 것뿐 아니라 PMC를 동원하여 은밀히 개입하고 있다는 정황도 풍부하다. 사실상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과 대리전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러시아가 병력을 더 충원하고 장비를 긁어모아 전쟁의 강도를 높인다 해도, 미국도 개입의 강도를 더 높여 대응할 것이다. 더 정밀하고 파괴력이 크고 값비싼 무기를 지원 하고, 더 세밀하고 결정적인 군사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과 나토의 개입이 러시아의 인내심의 한계치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요약하자면, 러시아가 어떤 결정을 하던 재래식 군사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니 품위를 지키면서 전쟁을 종결하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만약 일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러시아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는 불 보듯 확실하다. 러시아는 핵심 이익이 걸린 모든 곳에서 영향력을 급속하게 잃고, 서구에 에너지나 공급하는 후진적이고,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가난한 나라로 퇴락할 때까지 미국과 서구의 봉쇄를 받을 것이다.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 이후의 기억을 가진 러시아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러시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최소한 현상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수단을 쓰는 것이다. 재래식 군사력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러시아도 곧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쓸 수 있는 수단은 핵무기와 같은 비대칭 무기 밖에 없다.
핵무기가 실제 전쟁에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 꼭 '일어나지 않는 사건'은 아니다.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핵무기의 사용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핵무기를 엄청나게 많이 보유하고, 핵무기 타격 수단이 충분한 나라가 강력한 적들로부터 포위되어 치르고 있는 전쟁이 패전이 예상되고, 그 결과 국가의 존립을 위협을 받을 때와 같은 상황 말이다.
푸틴이 최소한의 판단력이 있으므로 동일한 수단으로 보복당할 게 뻔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리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푸틴이 궁지에 몰린다면 우크라이나 어딘가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곳에, 소형 전술핵무기(킬로톤 단위)를, 유리한 정전을 끌어내기 위한 위협 수단으로 사용해도 미국과 서방이 보복하지 못할 것이라 오판할 수 있다. 즉, 파괴력이 낮은 핵무기를 인명피해를 최소화 하는 상황에서 사용하면 상대방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확전을 피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아마 이번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은 이런 식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런 오판 뒤의 결과는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미국은 러시아와 맺은 2001년 ABM 협약을 탈퇴한 후 미국 본토를 탄도미사일로부터 방어하는 다층 방어망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미사일을 어떻게 미사일로 맞추냐?"는 기술적 회의론이 컸지만, 현재 미국 MD(missile defense) 시스템은 분명히 작동 중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과 소련(지금은 러시아) 사이에 핵전쟁을 막았던 공포의 균형, 상호확증파괴가 약해졌다.
러시아가 가진 핵탄두가 6,000개라는데 미국이 6,000개를 다 막을 수 있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와 미국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핵탄두 수는 다르다.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러시아의 투발 수단은 토폴2, 사르맛과 같은 ICBM, 잠수함에서 운용중인 미사일 정도이다. 미국은 선제공격으로 이런 투발 수단과 고정발사기지를 제거하고, 우발적으로 발사된 미사일은 MD 시스템으로 요격하면 핵 보복을 피하거나 최소화 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우위는 시간이 가면 점점 사라질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여러 나라가 MD 시스템을 우회하는 활공비행체나 스크램제트 방식의 발사체, 혹은 더 기발한 방식을 계속 고안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핵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지금 당장 하는 게 미국에 유리하다.
즉, 미국도 선제 핵 사용의 유혹이 커졌다. 러시아가 전술핵으로 모험을 한다면 자기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위의 예상이 맞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예상한 것이 크게 틀리지 않았고 그 결과 나타날 가능성이 큰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일이 더 평화롭게 풀릴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가 국가 정체성을 유지 못할 정도로 분열되거나, 역으로 우크라이나가 확실하게 패배하는 경우이다. 한쪽이 확실하게 지면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니면 기적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충돌 강도가 서서히 낮아지는 것이다. 둘 다 가능성이 낮은 시나리오이다.
내가 볼 때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까지 세상과 다르다. 1차 세계대전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 사람이 유럽 국가 사이의 대규모 전쟁 가능성에 코웃음을 쳤다. 그런 전쟁을 본 적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전쟁을 할 이유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문명이 최고로 눈부시게 발전하던 19세기 말에도 전쟁을 부르는 지정학적 응력은 쌓여가고 있었다. 유럽의 구석, 세르비아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는 우연한 사건이 적대적인 동맹 사이의 자동 개입을 불러오고, 전쟁 동원체제라는 근대적 전쟁 기계가 돌아가는 순간에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유럽과 세계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될 전대미문의 투쟁을 시작한 것이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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