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자. 서구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생산성과 인식의 도약을 이룬 문명이고 미국은 이런 서구의 직계 후손이다. 이들은 인류의 수준을 비가역적으로 변화시킨 후 두 번에 걸쳐 쇠퇴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유럽을 완전히 태워버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사실상 두 번의 세계대전은 단일한 응력에 의해 연속적인 전쟁이다. 이런 면을 처칠이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이 전쟁의 종결 시점에서 유럽대륙의 강국은 모두 해체되거나 약화하였다. 그리고 유럽 문명의 파생형인 미국과 소련에 세계의 주도권은 넘어갔다. 이쯤에서 예전 유럽의 열강들은 로마제국 시대의 고만고만한 그리스 도시국가 처지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의 쇠퇴다. 미국의 쇠퇴는 전쟁의 시작과 종결처럼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2007년 리만사태 쯤부터 분명해졌다. 이 두 사건의 원인을 따지는 것은 논지를 벗어난다. 확실한 것은 이 두 사건의 기저에 화폐의 타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2차 세계대전 기간은 금본위제가 흔들리는 기간과 궤를 같이한다. 놀랍게도 여러 저명한 경제학자가 금본위제, 즉 금이 화폐로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화폐 혼란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아이캔그린과 같은 저자는 당시의 금본위제를 '황금 족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당시의 화폐 혼란은 자국에 유리하게 금본위제를 통제하려 했던 각국의 정치적 결정 때문이지 화폐 제도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설명이 훨씬 타당하다. 유럽 열강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져 유럽을 가르는 지정학적 응력이 쌓이고, 군비를 비롯한 국가 간 경쟁을 위해 감당할 수 없는 재정을 집행하려는 시점에서 이미 화폐 타락의 씨는 뿌려진 것이다. 금본위제는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과 통화의 안정을 위해 독자적인 통화-재정 정책을 양보한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는 열강들이 독자적인 통화-재정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치가 화폐를 타락시킨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이 혼란을 정리한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1년 닉슨이 금본위제를 파기하면서 사라졌다. 이때부터 나타난 현재의 명목화폐는 그저 화폐 타락의 이쁜 이름일 뿐이다. 이 명목화폐가 지금 왜 위기인가 궁금해하면 중요한 관점을 놓치게 된다. 왜 이렇게 오래 버텼는가가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금은 인류 대부분에 소유욕을 자극하는 보편적 상품이다. 내가 금을 반짝이는 돌 수준으로 생각한다 해도 누가 금을 준다면 덥석 받을 것이다. 받은 금을 원하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다른 재화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되거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규격화된 상품은 중간 상품으로서 화폐가 될 수 있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오늘부터 모든 지폐와 동전, 전자적 화폐의 사용이 불가능해진다면 내일부터 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보편적으로 필요하고 사용되는 규격화된 상품이 된다. 금, 은, 담배, 쌀, 휴지, 등등 규격화된 상품이 중간 상품으로서 화폐가 된다. 금은 이런 '중간 상품으로서 화폐' 사이의 경쟁에서의 최종승자였던 것이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거래의 편의성을 위해 발행된 금의 보관증, 혹은 지불각서와 같은 문서가 바로 화폐였다.
지금 화폐는 어떤 중간 상품의 보관증도, 지불각서도 아니다. 그냥 종이다. 그럼 뭘 믿고 쓰는 건가? 남도 다 쓰니까 그냥 쓰는 거다. 이런 시스템이 50년 넘게 유지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례적이다. 이 제도가 이례적으로 유지된 이유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힘이다.
달러는 금과의 연동을 포기했지만 이른바 '페트로 달러 체제'라는 장치로 화석 에너지의 결제를 사실상 독점했다. 에너지의 결제 수단을 독점하면서 달러는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 결제 수단으로 네트워크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냉전 당시 소련도 가스와 석유 판매대금으로 달러를 받았다. 사실상 고만 고만한 명목화폐들 사이에서 다른 대안도 없었다. 에너지 거래 수단과 국제결제 수단으로서 달러의 지위에 도전하는 것은 미국이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우디 부류의 중동 왕정국가가 왜 원유의 결제 수단으로 달러만 쓰기로 약속했을까? 체제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국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왕정 체제의 유지다. 지금 미국이 중동에서 후퇴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 위치로 영리하게 물러난 것이 아니다. 자기 이익을 좆아 나 몰라라 떠나는 것이다.
미국이 물러난 빈자리에서 안보 불안에 떨던 사우디를 최대 안보 위협인 이란과 화해시킨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이 중동의 중요한 갈등을 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이란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독특한 입장과 경제적 중요성으로 볼 때, 중국은 이미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역외세력(offshore power)이다.
최근 UAE가 한국의 T-50 대신 중국의 훈련기를 사고, 천무 외에 중국제 다연장로켓을 산 뉴스는 UAE와 미국 갈등의 연장선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느라 F-35의 UAE 판매를 취소하자 UAE는 곧바로 프랑스의 라팔을 구입했다. 이후로 미국과의 거리를 두고 있고, 미국의 영향력이나 기술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 무기 대신 중국의 무기를 사고 있다.
페트로 달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사우디와 UAE가 이 정도면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중동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갈등을 중재할 신뢰를 잃었다. 앞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그림자를 볼 때는 이스라엘-이란의 분쟁에서 이스라엘의 후원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중동 대부분의 나라가 미국을 적대적 위협으로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미 중국은 위안화로 원유를 거래하는 것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란이야 당연히 위안화로 거래 중일것이고 다른 국가도 머지 않아 다양한 화폐로 원유를 거래하기 시작할 것이다. 페트로 달러의 붕괴, 즉 화석연료 결제 수단의 다양화는 임박했거나 이미 암묵적으로 시행 중이다.
국제 결제 수단의 다각화는 유로화의 등장부터 이미 본격화하였다. 그러나 유로, 파운드, 엔화 모두 미국이 주도하는 시스템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달러의 작동방식을 직접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난 흐름은 시스템 안에서의 사소한 대안이 아니다. 시스템을 전복하거나 분리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중 하나가 암호화폐다. 미국과 각국 정부가 독점하는 화폐 시스템에 대한 민간 분야의 도전이다.
더 위협적인 흐름은 아예 서구의 통화-결제 시스템의 의존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미국-서구와 친하지 않은 나라는 당연히 이런 노력을 하기 마련이다. 무지하게도 이런 움직임을 도와준 것은 미국 자신이다. 소소한 테러단체나 북한, 이란 정도를 결제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러시아 같은 나라에 똑같은일를 하는 게 가능하리라는 생각은 안이하고 자기파괴적이다. 라그람 라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인도 중앙은행 총재는 이런 행위를 "경제의 핵무기"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경제 핵무기를 쓰고도 러시아에 타격을 주지 못했다. 결국 미국과 서구의 신뢰만 땅에 떨어졌다. 이제 국제 결제 수단이자 준비(외환 비축) 수단으로서 달러에서 이탈하려는 흐름은 훨씬 빨라지고 있다. 미국에 찍히면 자신의 외환보유고가 압수당할 수 있다는 걸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Five eyes나 EU, 이스라엘, 일본이나 한국(?) 정도가 아니라면 누구도 미국에 찍히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러시아를 이란, 중국, 북한, 시리아와 같은 체제 도전 세력 편으로 밀어 넣고 중립적인 여러 나라를 불안하게 한 대가는 머지않아 미국 자신이 치를 수밖에 없다.
이런 흐름은 필연적으로 기존 화폐 시스템의 쇠퇴를 불러온다. 그 빈 자리를 채울 화폐 시스템은 앞으로 나타날 세상의 형태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인류처럼, 회복력을 발휘하여 다시 한번 인식과 부, 기술이 확장하는 길로 간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나타나는 화폐제도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특성이 요구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 중간상품 자체, 혹은 중간상품의 교환증이거나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을 채권화한 것
- 중앙화된 누군가에 지배되어 화폐타락을 겪지 않을 것
- 가치 저장, 가치 분할, 가치 교환이 대단히 용이하고 전자적으로 가능할 것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진 화폐가 다양하게 사용될 것이라는게 내 예상이다. 이제 사용될 화폐는 다양화 된다. 한마디로 "비트코인이 달러를 대신해 기축통화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중간상품의 교환증이거나 중간상품을 채권화 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금본위제 당시 각국의 화폐가 다 이런 성격이었다. 명목화폐 인플레이션의 매운맛을 본 사람들은 당연히 "실제 가치"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제 금과 은으로 결제하는 것은 번거로우므로 믿을만한 존재(국가나 초대형 다국적 기업일 가능성이 크다.)가 보증하는 중간 상품의 보관증이나 채권이 화폐로 사용될 것이다. 이런 중간 상품에는 금, 은, 식량, 필수 소모품의 교환권, 심지어 앞으로 채굴될 비트코인에 대한 권리일 수도 있다.
화폐 타락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는 한 국가에서 국가나 국가기관이 화폐를 독점하지 못하여야 한다는 의미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국가나 국가의 위임을 받은 존재가 화폐를 독점하지 못한다는 선언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국가 내에서 정부가 독점하는 화폐의 당연한 귀결이 화폐 타락이라는 사실을 더는 감출 수 없게 될 때, 이 원칙은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다.
전자적으로 저장과 교환이 가능해야 하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 피할 수 없다. 명목화폐 제도에서도 인터넷으로 뭔가를 사고 파는데, 금이나 은을 직접 들고 사용하라는 것은 문명을 수십 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금과 은도 이렇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채권화하거나 보관증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금을 스마트폰이나 전자지갑에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전자적으로 저장과 교환이 가능한 가치 있는 중간 상품이 한 사회 내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게 다음 화폐제도의 본질일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 기업에서 발행한 화폐와 함께 암호화폐도 중요하게 활용될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에 대한 거부감은 대체로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 한 사회에 사용되는 화폐가 다양하다면 그걸 모두 갖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냐? 그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는 암호화폐의 스왑기능을 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내가 지불에 사용하려는 화폐와 상대가 받기 원하는 화폐는 거래 완료 즉시 환전이 이뤄질 수 있다. 기술적으로 이미 가능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현재 환전 시스템을 모두 이런 식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게 안 되는 이유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라 이를 막는 강력한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다양한 화폐의 가치 변동은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다. 이는 화폐의 본질에 대해 너무나 잘못된 세뇌를 수십 년간 들어서 생긴 혼동이다. 인류 역사상 화폐 자체가 "상품"이자 교환이 잘 되는 "물건"이었다. 당연히 상품 간 교환비는 달라진다. 각자의 판단으로 자기가 부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데 사용하는 화폐를 결정하면 된다. 안정성을 원한다면 유력한 화폐를 적당히 포트폴리오화 하여서 보관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결국 유력한 화폐는 몇 개 정도로 압축된다. 그런 상태에서 상대적 가치가 급격히 변하는 일은 최소화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각 국가가 발행하는 돈의 가치인 환율도 요즘에는 무섭게 변한다. 달러의 가치가 일 년 사이 1,100원에서 1,450원으로 오르더니 다시 1,230원까지 내려갔다. 화폐 간 가치 변동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명목화폐의 가치는 장기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이뤄진다. 바로 가치가 없어지는 쪽이다. 애호박이 20년 전에 200원이었고 지금 1,000원이라면 20년 후에 가치는 대략 5,000원쯤 할 것이다. 이런 화폐를 사용하면서 가치가 유지되는 화폐 사이의 환율 변동을 걱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화폐 가치는 지금도 무섭게 요동치며 사라지고 있다. 이를 못 느끼고 오히려 다양한 화폐의 사용을 두려워하는 것은 가치의 저장과 교환의 수단을 직접 결정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예로 살던 사람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것과 유사하다.
셋째. 암호화폐가 무슨 '근본적 가치'가 있냐는 것이다. 아주 유서 깊은 말이고 머리가 완전히 굳어버린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많지 않은, 심지어 금본위제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의 입에서도 종종 이런 말이 나온다. 이런 말은 가치가 물건이나 상품에 영혼처럼 스며들어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물건에 대한 평판과 선호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다.
그렇다면 금은 '근본적 가치'가 있는가? 그 가치가 금 원자에 부착되어 있는가? 아니다. 금에 대한 평판과 시장에서의 선호가 금의 가치의 전부다. 산업적 수요? 금보다 희귀하고 산업에 필수적인 희토류가 수두룩하다. 금이 이런 희토류 물질보다 화폐로 적합한 것은 적당히 희귀하면서도 이쁘기 때문이다.
희귀하고, 산화되어 사라지지 않는 오묘한 광채에 매료된 고대 여러 문명의 지배층이 자기 과시와 장식에 이를 쓰이기 시작했고, 결국 많은 사람의 부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원하니 그 시장 가격은 올라갔고, 시장에서 언제든 다른 물건과 교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의 저장 수단으로 각광 받았다. 그리고 은이나 동, 기타 다른 중간 상품과의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선택 받아 이제는 장신구 따위를 넘어 각국 중앙은행의 준비금으로 쌓여 있다. 이해했는가? 근본적 가치 따위는 원래 없다. 거래되는 시장에서의 평가가 가치다. 따라서 "금은 근본적 가치가 있는데 비트코인은 근본적 가치가 없다"라는 소리는 "내가 보기에 금은 가치가 있는데 비트코인은 가치가 있는 줄 모르겠다"라는 소리의 변형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신이 아니라 한낱 시장에 참여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비트코인을, 혹은 다른 암호화폐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트코인이 가진 근본적인 희귀성을 본다. 발권력을 독점할 수 없는 우아한 시스템을 본다. 돈이 국경을 넘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직접 연결할 때 나타날 인류의 인식과 부의 도약을 본다. 그리고 암호화폐가 만들어낼 수 있는 화폐의 진정한 시장화를 본다. 시장에서 나타난 이런 평가와 선호가 비트코인의 가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근본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은 가치의 근본적 개념부터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혹시 금이나 명목화폐는 눈에 보이는데 비트코인은 안보여서 근본적 가치가 없는 거란 말이라면 반박할 가치도 없다.
지금 명목화폐 제도에서 화폐 공급의 대부분은 은행의 신용창조에 의지한다. 이게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한 줄의 문장으로 보여 주겠다. 당신이 사업, 혹은 주택 구입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돈의 대부분은 은행이 공짜로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을 완벽하게 묘사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핵심은 정확히 짚었다고 확신한다. 당신이 이자를 갚느라 뼈 빠지게 일하게 만들고, 경제적 빈곤으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빚의 정체는 원래 공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은행이 공짜로 만든 것을 당신에게 빌려주면 당신은 실제 용역을 제공하고 재화를 생산하여 갚아야 하는 거다. 최고로 효율적인 노예제다.
명목화폐 제도를 정당화하려는 논리 중 명목화폐는 국가가 갚기로 한 채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값아야 할 채무를 어떻게 은행이 신용으로 창조하는가? 인플레이션으로 사라지는 종이를 종이로 값는게 정말 채무를 이행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는데 이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시장원리도 아니다. 그냥 부패한 화폐제도일 뿐이다. 이런 화폐제도를 옹호하며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앞으로 나타나야 할 화폐 시장화의 아름다움은 저런 기만이 없는 것이다. 화폐도 시장에서 선택받아야 한다. 비트코인이던, 이더리움이던, 국가나 기업이 어떤 가치에 기반하여 발행한 채권이던, 금-은 같은 귀금속의 보관증이던 상관 없다. 시장에서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누구도 화폐를 독점하거나, 화폐를 무(無)에서 '창조'할 수 없다.
또 다른 아름다움은 가치만 인정받는다면 어떤 것도 직접 시장에서 화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화폐 가치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직접 화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신용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도 있다. 이는 "국가의 신용"이니, "은행의 신용"이니 하는 두루뭉술하고 수십 번 부도난 공수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회사 이윤에 대한 분배금, 혹은 채권도 주식이나 회사채라는 이름으로 명목화폐로 가격이 평가되는게 아니라 직접 화폐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이윤에 대한 분배금을 SS coin이란 이름으로 화폐화할 수 있다. 삼성이 1년 뒤 5%의 SS coin을 이자로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액면가가 SS coin으로 표시된 채권을 발행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삼성 생태계 안에서 SS coin의 사용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삼성의 이윤과 신용, 삼성 생태계에서의 확실하고 우월한 사용기능을 결합한 화폐다. 아마 이런식의 기업 발행 화폐는 블록체인 기술로 발행될 것이다. 유명한 초국가적 기업은 기회만 된다면 반드시 이런 시도를 한다. 당신에게 돈을 발행할 권한을 준다면 거절하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도 발권력을 가질 기회를 포기할 리 없다. 물론 시장에서 다른 화폐와 경쟁해야겠지만..
앞으로 수년 안에 이런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기존의 화폐경제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한 후 나타난다. 아마 후자가 전자를 촉진하거나 자극할 것이다. 화폐경제의 모순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SVB를 비롯해 다수의 은행이 부도나거나 부도나기 일보 직전이다. 원래 악명이 자자했던 크레딧스위스 은행도 휘청거리고 있다. 제멋대로 찍어낼 수 있는 부루마블 돈으로 파생상품을 사고팔며 거품을 제조해 냈던 시스템이 흔들려 금리 인상을 계속해갈 체력이 없는데 인플레이션은 아직 끈적끈적하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을 단호하게 인플레이션을 잡기보다 머뭇거리며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면서 파국의 발생을 연장하는 선택을 하리라고 나는 예상했다. 며칠 뒤 연준의 금리 결정을 보라. 동결하거나 25p 올리는 데 만족할 것이다. 사실상 금리 인상을 통한 통화량 조절을 포기하는 수순이다. 그렇다고 "유동성의 과잉 공급"이라는 이쁜 이름으로 부르는 명목화폐의 발행 남발이 부작용 없이 해결될 리 없다. 인플레이션은 끈적하게 달라붙는데, 경기는 침체하며 경기 전반이 위축되면서 실물경기와 금융 불안이 서로를 악화하는 현상은 확실한 붕괴까지 계속될 것이다.
당장 달러와 원화가 휴지 조각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달러는 위기가 고조되는 동안 명목 화폐 중에서는 강세를 보일 것이다. 상당 기간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서서히 가치를 잃는다는 것이다. 이걸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지표는 금 가격이다.
닉슨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1971년부터 인플레이션이 정점에 이른 1980년대 중반까지, 서브프라임 사태로 돈을 풀기 시작한 2007년부터 연준이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긴축을 시작했던 2013년까지, 금 가격이 얼마나 급격히 올랐는지 보라. 금을 억누르려고 미국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앞으로 상당한 금값 상승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금이 대단하다는 말이 아니다. 명목화폐에서 가치 있는 중간 상품으로 대피하려는 흐름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치 있는 중간 상품은 금뿐이 아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치를 인정받은 암호화폐도 가치있는 중간상품이다. 그 가치는 "독점자에 의한 추가발행의 불가능성", "기록 변형 불가능성", "국가에 의한 재산권 침해에 대한 저항성"에서 나온다.
만약 역사의 흐름이 바뀐다면? 국가 사이에 강력한 담장이 쌓이고, 만성적인 분쟁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교역과 문화의 전파는 방해받고, 지역마다 각자의 독자적 정체성과 우월성을 주장하는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면? 시장원리 자체가 위축될 것이고 그 여파로 화폐의 시장화도 실현이 요원할 것이다. 시장이 위축되는 곳에 힘의 균형에 필요한 정치적 분권화, 법치, 기본권이 유지될 리도 없다. 또한 우리가 도달한 객관적 인식도 인간을 통제하려는 강력한 세뇌와 사상주입으로 위협받을 것이다. 이게 극단적으로 이뤄지면 북한이 되는 것이고, 약간 순한 맛으로 일어나면 중국이 된다. 우리의 노년은 어쩌면 부르카 속에서 예전 자유롭게 미니스커트를 입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아프가니스탄 중년 여성의 처지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부와 자유로운 인식은 사실 시장을 통해 전 세계적인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잃은 다음 소중함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이 이런 암흑기가 오더라도 영원히 문명의 불씨를 꺼버리거나 국제적 협업을 막을 수 없다. 핵전쟁으로 영화에 나올법한 완전한 문명 파괴를 겪지 않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은 망상에 기반한 역사-혈통 공동체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나와서도 안 된다. 서구의 근대화에서 나온 가치에서 나온다. 극도로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서구의 후예이다. 이게 우리가 미국의 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에서 나타난 기술-인식의 확장이 만들어낸 문명의 후예라는 이야기다. 이를 잊는다면 우리는 곧 민족적 우월성을 호소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게 아니라면 자유, 평등, 법치, 보통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사라져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이 문명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분업에 의한 엄청난 생산성을 가능케 하는 가치관과 인식이다. 이는 억압한다고 사라질 수 없다. 결국 세계적인 분업화와 기술 혁신, 경제성장과 인식의 확장은 언젠가는 다시 시작된다.
지금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중요한 길목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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