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 외교정책을 주장하는 존 미어샤이머, 스티븐 월트 교수는 공저 "이스라엘 로비(원제 The Israel Lobby and U.S. Foreign Policy)"에서 미국의 중동정책과 대(對)이스라엘 정책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고, 여러 차례 전략상의 재앙을 맞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중동 정책에 끌려다니는 것은 이스라엘 로비 단체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앞으로 이스라엘을 보통 국가로 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중동에서 미국 국익에 맞는 외교 전략을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며 이는 미국뿐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큰 피해를 줄 것이다.
위 저서가 나온 것이 2007년이다. 위 책에서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두 국가 해법", 즉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세워주고, 골란고원에서 철수하여 1967년 이전 국경을 회복하는 대가로 평화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큰 틀에서 전 세계가 동의하는 해법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지상전을 수행 중이다. 국제 여론의 눈치를 살피느라 상징적인 대규모 침공 퍼포먼스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침공의 규모와 강도를 줄였다는 것은 아니다. 가자지구의 통신과 교통을 완전히 통제하여 정보를 블랙아웃한 후, 천천히 구역과 구역을 장악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이미 가자지구 북단은 포위된 상태다. 이 전쟁이 1-2달 안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고 확전 위험도 커질 것이다. 이제 "두 국가 해법"은 물론 미국의 중동정책도 파탄 나 버렸다.
하마스는 잔혹하고 조잡한 공격으로 초강대국 미국과 이스라엘을 함정에 빠뜨렸다. 마치 월남전의 구정 공세를 보는듯하다. 구정 공세에서 미국의 가장 큰 적은 월남군도, 월맹 게릴라도 아니었다. 미국의 가장 큰 적은 카메라였다. 미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생방송으로 TV에 나왔을 때, 이 전쟁을 두고 일어난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국가 분열이 미국의 전쟁 수행을 가장 크게 방해했다. 지금 이스라엘-가자 전쟁을 두고 일어나는 여론의 흐름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유리하지 않다. 하마스는 군사적 성취와 상관없이 전략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했다.
국제법이니 인권이니 하며 요란하게 떠드는 서구와 우리나라의 언론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은 서구사회의 최전선이자 전초기지라는 점이다.
세계는 서구적 가치관(보통선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재산권에 바탕을 둔 시장원리, 인간의 기본권에 기반한 가치체계, 등)에 기반한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서구적 가치가 최종적으로 승리했으며 세계는 단일한 가치관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교만한 선언도 있었다. 이른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했던 "역사의 종말"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이 서구적 가치관에 수렴하여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과 시장을 이루기는커녕, 서구는 점점 위축되고 호전적인 적들에게 포위되고 있다. 그 최전선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 여러 잣대를 들이대며 도덕적 비난을 퍼붓거나, 역사적 정성을 따지며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비(非)서구 국가에 포위된 서구 국가이고, 그 서구 국가가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스라엘이 패배하면 그 다음 목표는 유럽이다. 근동과 지중해 동부에 이스라엘이라는 방패막 없이 강력한 이슬람 문화권 국가와 마주하는 것 자체 만으로도 유럽의 안보는 훼손된다.
그럼에도 유럽과 미국, 우리의 일부 언론은 자기들도 지키지 못할 괴이한 국제법과 기만적인 인권,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이스라엘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린다.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살 1파운드를 떼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서구인이 심하게 가축화 되었고, 그들이 만든 문명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유럽과 미국 외교를 움직이는 가치관은 이들 나라에서 온 빈대 만큼이나 해롭고 위험하다.
서구식 사고방식의 극적인 예가 바로 10월 7일 가자 부근에서 열렸던 슈퍼노바 페스티벌이다.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축제 주제는 ‘연대와 사랑의 여정(A journey of unity and love)’이었다. 힘든 삶을 견디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 바로 옆에서 신나게 놀고 춤추고 술마시고 이성을 만나는 것을 이 페스티벌의 참여자들은 약자와 연대라고 생각했다. 구역질 나는 일이다. 이들의 위선적인 모습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안전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이다. 하마스 대원이 낙하산을 타고 눈앞에 내려오는 순간까지 이들은 이를 자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쇼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위험이라는 개념을 상실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그대로다. 이들이 이번 사태의 모든 피해자 중 가장 불쌍하지 않은 자들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단체로 다윈 상을 주고 싶은 정도다. 이게 전반적인 서구의 현실 인식 능력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대리전을 치르는 동시에, 가자지구에서 이슬람 테러리즘과 대리전에 휘말렸다. 둘 다 미국이 원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실수에 이자가 붙어 지금 나타난 것뿐이다. 그 실수는 현실 세계에 부합하지 않는 "자유주의 패권"을 추구한 것이다. 안이한 상황판단으로 나토를 확장해 러시아의 반격을 받았고, 비이성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모든 중동 정책을 그르쳤다.
그 실수의 비용은 엄청나다. 우선 이번에 미 상원이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묶어 지원하려는 돈이 대략 142조 정도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금액도 대략 140조 정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더 들어갈지 알 수 없다. 만약 원치 않는 확전이 있을 경우 돈이 아니라 미국이 직접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 정치에 미치는 파장도 만만치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염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반발도 상당하다. 이 주제는 미국의 여론을 반으로 나눠버릴 것이다. 그 결과는 첨예한 갈등에 따른 국론 분열, 국민 간 구심력의 약화다.
이미 미국은 정치적으로, 인종적으로, 지역적으로 분열되고 있다. 정치, 인종 갈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지역적으로 북과 남으로 분열 중이다. 조지아, 텍사스와 같은 남부 주와 전통적인 북부 주의 정치적-사회적 차이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정치적 갈등에 따라 연방 정부의 정책과 주 정부의 정책이 충돌할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민정책에 관한 연방정부와 텍사스주 정부의 견해차와 같은 것이다. 이 갈등이 심해지면 주 정부의 독자성을 높이려는 시도, 혹은 아예 독립하려는 시도도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 걸어온 길을 보면 이게 황당한 주장은 아니다.
미국이 휘말린 대리전의 가장 치명적인 비용은 진정한 숙적에 대비해야 할 자원을 낭비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모든 혼란 가운데 조용히 이득을 챙기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늪에 빠진 것도 모자라, 중동 정책이 파탄 나고, 중국의 일대일로를 견제하겠다고 야심 차게 준비한 IMEC이 시작도 못 해보고 단 한 번에 좌초되는 것을 표정을 관리하며 바라보고 있다. 아마 이번 참에 미국이 헤즈볼라-이란과 직접 대결하여 또 한 번 늪에 빠지길 바랄 것이다.
서태평양, 최소한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의 힘의 균형은 뒤집혔다. 미국은 이제 대만해협에 항모전단을 보내 중국을 겁먹게 할 수 없다. 중국은 마음만 먹으면 남중국해에서 미국을 구축할 수 있다. 단지 큰 피해를 보지 않고 대만을 점령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게 중국의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모든 상황이 중국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은 허약하고, 국민은 고립주의 노선을 선호하며, 정치적-인종적-지역적으로 분열 되었다. 중동과 동유럽에서 지저분한 대리전에 휘말려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리더십은 이런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 미국은 근본적인 정체성 위기를 해결하지 않고 다시 그 힘을 되찾을 수 없다.
즉, 미국은 동북아에서 군사적으로 우위를 잃었고, 정치-경제-기술 면에서 중국의 부상을 장기간 억압하기도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동북아 군사 전략은 미국이 벌이는 일은 한국과 일본의 군사 동맹을 유연하게 연결하여 대(對)중국 군사 동맹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경제-기술 정책으로 한국과 일본의 첨단 생산시설을 미국에 유치하여 무너진 자국의 산업을 부흥시키고 첨단기술의 병목지점인 반도체 기술에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수세적인 해결책이다. 공세적으로 상대의 군사적 도전 의지를 꺾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경쟁을 포기할 정도로 경제-기술 격차를 늘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미국의 경제정책은 아예 대놓고 착취적이다. 현 정부가 처한 국내외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윤석열 정부는 공수표를 믿고 미국에 너무 많은 것을 내줬고, 외교적 유연성을 포기했다. 이 모든 비용을 정당화하는 단 한 가지 목표는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힘을 모아 다시 한번 서구(우리가 보편적이라 부르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에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번 이스라엘 사태를 보며 느낀 점은 절망감이다. 미국은 물론 서구 국가 대부분이 상식적이고 타당한 전략에 기반해 생존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절망이다. 국내 여론이나 정치적 난맥상으로 미국은 더는 국외에 군사적 개입을 하기 힘들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 개입하는 것만으로도 한계다. 유럽은 바보 취급 받으며 서서히 쇠락할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우리가 믿는 보편적 가치는 유럽과 북미 일부에 존재하는 우스운 문화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동북아 모델은 명확하다. 이전 글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장과 군사력 건설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동북아는 상대방의 힘을 존중하는 나라들끼리 긴장감을 유지하되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으로 변해야 한다. 중국이 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는 것은 상수(常數)다.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 최소한 동북아에서 중국과 힘의 균형을 맞추는 변수(變數)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전략에서 미국이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졸(卒) 역할을 하다가는 무익한 분쟁에 휘말린다. 반대로 미국이 물러난 힘의 공백에 아무 대비도 없이 노출되었다가는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과 같이 강대국이 대리전을 치르는 전장이자 완충지가 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겉모습과 상관없이 서구적 가치관을 가졌다. 서구적 가치관을 보편적이라고 믿고, 서구적 제도로 국가를 운영한다. 우리는 보통선거와 언론의 자유, 개인의 재산권을 당연시한다. 이 가치관은 소중하다. 이런 가치를 유지하되 서구의 망상적-마술적 사고는 배격해야 한다. 이런 사고에서 나오는 모든 외교-안보 전략과도 거리를 둬야 한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성별은 '자신이 정의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 성염색체의 종류나 반수체(gamet)의 크기에 따라 구분될 수 없다. 즉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의 내리는 바에 따라 성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나도 자신이 여성, 중성, 자신이 정의한 어떤 성으로도 될 수 있다. 이는 소수자를 존중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 이성의 종말이다.
이제 성(性)을 안전으로 바꿔보자. 이들에게 안전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이고 냉혹한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정의와 관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안전하다고 선언하면 나는 안전해진다. 수십 년 간 실제로 안전했던 것은 미국 패권의 결과라는 것은 생각해내지 못한다. 이런 가정에 따라 국제 전략을 짜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에 먹힐 리 없다.
서구의 대학을 포함해 모든 교육기관에서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결국 각자 자신을 신(神)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종교의 종교기관이 되고 있다. 아랍의 마드라사나 유교의 서원, 힌두교의 아슈라마(ashrama)와 같은 수준이다. 게다가 서구의 것이 훨씬 볼썽사납다. 이런 객관적 현실 인식능력 저하는 서구 사회의 총체적 가치 타락의 결과다. 한계지능이나 저능아가 모는 비행기에 같이 타면 같이 죽는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관을 정립해야 한다. 국가관이라고 하면 너무 국수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생존관이라고 부르자. 길면 수십 년을 지속할 혼란한 국제 질서에서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낼 전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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