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지구(empty planet)라는 책은 산업화-근대화와 저출산 문제의 연관성을 다룬다. 이 책의 요점은 산업화-근대화한 나라 전체에서 저출산이 일어나며 이는 산업화-근대화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특성은 다음과 같다.
- 자식이 노후 대책이 되던 현상은 산업화와 함께 약화하고 출산과 육아에 따른 비용이 커졌다.
- 산업화-근대화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일으키고, 여성이 주체적 결정을 할 역량도 높인다.
- 도시화는 개인을 원자화하여 혈연-지연 기반 사회가 주는 전통적 결혼-출산 압력을 줄인다.
- 근대적 세속화에 따라 출산을 장려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종교적 영향력이 줄었다.
즉, 근대 산업사회는 그 본질상 결혼과 출산을 방해한다. 이런 현상은 중동, 아프리카, 인도, 산업화가 진행 중인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서구적인 현상이 아니다. 결국 모든 산업사회가 출산율 2.0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게 위 저자들의 주장이고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럼 한국의 출산율도 위 산업화의 영향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어떤 산업사회도 출산율이 0.7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의 저출산은 한국적인 현상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이와 관련하여 탁월한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은행은 한국형 저출산의 원인으로 젊은이가 느끼는 ‘경쟁압력’과 ‘불안’을 지목했다. 뭘 불안해 하나? 고용과 주거, 양육을 불안해한다. 한국 사회에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양육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이 너무 크고, 자기 집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이게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안의 핵심이다. 젊은이들 불안의 핵심에 주거 불안이 있다.
국토연구원도 한국형 저출산의 원인으로 주거불안과 높은 사교육비를 지목했다. 높은 사교육비는 한국은행이 말하는 양육 불안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도 젊은이가 느끼는 주가 불안을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높은 사교육비에 따른 양육 불안은 한국은행이 말한 '경쟁압력'의 결과다. 한국은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기준이 협소하다. 대부분 부모가 원하는 직업이 의사, 법조인, 전문직 몇 개로 한정된다. 그 결과 이런 직업에 이르기 위해 막대한 교육비가 지출이 필요하다는 통념이 팽배하다. 이는 사람을 직업과 경제력으로 판단하고, 사람을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냉혹한 시선으로 구분하는 한국 사회의 병적인 문화 탓이다. 즉, 한국사회의 경쟁압력과 높은 교육비는 이런 병적인 한국 사회가 원인이다. 그리고 이런 병적인 문화는 하루아침에 고칠 수도, 정부가 손볼 수도 없다. 정부와 사회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최소한 주거 불안을 줄여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한국형 저출산의 원인 중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주거 불안뿐이다.
한국형 저출산과 유사한 경험을 하는 사회로 홍콩과 중국이 있다. 홍콩의 최근 출산율은 0.8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중국의 출산율은 최근 1.09로 한국과 홍콩보다 나아 보이지만 그 감소 추세는 가파르다. 몇 년 사이에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도 주거 불안이다. 2023년 소득 대비 주택가격지수(PIR)이 높은 도시 중 1, 2, 3위가 상하이, 베이징, 홍콩이다. 고도로 산업화한 국가 중 한국, 홍콩, 중국이 가장 집값이 높은 나라라고 봐도 된다. 전 세계적으로 주거의 불안은 산업화가 원인이 된 출산율 하락을 극도로 악화하는 원인이다.
인간을 넘어 동물의 본성을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된다. 자기 몸 뉠 자리와 자기 배를 채울 음식이 없으면 어떤 동물도 번식하지 않는다. 근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칼로리를 못 채우기는 쉽지 않다. 결국 집이 문제다.
이런 면에서 이번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사악하다. 뭔가를 사악하다고 말할 때는 단순히 행위의 결과만을 말하지 않는다. 행위의 의도와 목적. 이를 위해 희생한 가치까지 평가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부동산 대책의 핵심은 부동산 가격 하락이 경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내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자기 인기가 떨어지느니 차라리 부동산 거품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친여 성향의 동아일보에서조차 "저절로 떨어지는 집값도 못 잡은 정부는 처음"이라고 일갈했다. 자기 인기를 위해 국가 최선의 이익을 져버린 정부를 비꼰 것이리라.
윤석열도, 이재명도, 정부 관료도 모두 집값이 한국 사회를 서서히 죽이고 있는 걸 안다.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출산율도, 한국의 미래도 없다는 걸 잘 안다.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작년 초부터 부동산 PF는 난리였다. 이번 정부는 시장을 통한 PF 부실의 해결을 촉진하기는커녕, 온 힘을 다 해서 부동산 PF가 터지는 것을 막았다. 태영건설의 부실 문제도 총선 후까지 끌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조합원들이 레밍의 집단자살을 흉내 내다 망할뻔한 둔촌주공아파트 분양 완판을 위해서 정부는 원포인트로 시행령을 고쳐주고 법까지 고쳐주려 했다. 50년 담보대출이니 디딤돌 전세대출이니 하며 부동산에 막대한 유동성을 쑤셔 넣은 것도 기억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의 동기는 분명하다. 귀찮고 복잡한 문제가 터지는 것을 미루고 가려서 내 인기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유동성 잔치에 빤쓰를 벗고 흥청망청했던 건설업 관계자와 금융업자, 부동산 투기 세력은 막대한 이익을 사유화했고, 젊은이들은 주거 불안에 절망했다. 한국 사회는 느긋하게 자살 중이다. 이 모든 결과와 의도가 사악하고 사악하다.
지금 저출산 대책 내용은 대충 이렇다. "아기 낳으면 저리 대출!!!, 아기 낳으면 파격 혜택!!!, 아기만 낳아봐 혜택이 쏠쏠해!!" 거의 약장수가 약 파는 수준이다. 아이를 낳으면 복잡한 관료적 조치를 통해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윤석열도, 이재명도, 정부 관료도, 국민도 안다.
한국형 저출산의 해법을 원하는가?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도록 내비두라. 이를 연착륙 시켜야 한다는 헛소리도 하지 말라. 경제에 미치는 엄청난 피해 운운하지도 말라. 고름이 차서 죽기 직전인 인간이 "약을 써서 천천히 치료해야 한다", "고름을 째면 아프다"라고 헛소리하는 것이다.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여 한국 사회와 경제가 폐허가 되게 하라. 그 폐허에서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이는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도권 주택가격이 2-3억이, 서울의 부동산이 4-5억이 되면 젊은이들 주거에 희망이 생긴다.
작년 초 레고랜드 사태와 둔촌주공 사태, 집값 하락기에 거품이 터지도록 가만히 있었다면 거품 붕괴의 고통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이런 거품을 더 키운 게 현 정부다. 그렇게 미루고 숨겼던 PF 부실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지금, 이를 막겠다고 공적자금을 투입하거나,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부채 탕감을 촉진하는 어떤 행동도 필연적인 거품 붕괴를 더 크고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경제가 작살 나는데 집값 떨어지는 게 중요하냐고? 그렇다. 경제가 작살 나서 대한민국이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준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실업자가 들끓는다 해도, 젊은이가 주거 불안으로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나라보다 낫다. 한국은 경제 위기를 국가 체질 변화로 극복한 예가 있다. 부동산 관련 기득권과 정부 관료, 부동산 투기 세력이 사회를 서서히 살해하는 것보다 더 큰 위기는 없다.
지금 야당은 내가 본 이전 어떤 야당보다 지지부진하고 분열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재명 당대표는 개인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어떤 야당 지도자보다 이기적이고 교활하다. 이런 야당과 대결하더라도, 윤석열 정부의 미래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야당의 삽질보다 정부의 삽질이 더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위대하고 현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듣기 좋은 헛소리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국민은 누가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았는지, 누가 주거 불안을 증폭했는지, 누가 부동산 관련 기득권층의 편을 들었는지 안다. 이런 자명한 사실을 모른다면 그 지도자는 자기 객관화와 현실 인식능력이 약화된 것이다. 나는 이런 한국 지도자들의 유서 깊은 정신병을 청와대라는 구중궁궐이 일으키는 부동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주변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지도자는 자멸한다. 이점 명심하고 부동산 정책을 펴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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