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전간기(前間期,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에 관한 권위 있는 책 중,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숙독했다. 아이켄그린의 “황금 족쇄”, 테민의 “대공황 전후 세계 경제”, 킨들버거의 “대공황의 세계 1929~1939” 세 권이다. 모두 전간기 경제-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다. 어째서 파괴적인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에도 또다시 세계대전으로 끝난 혼란에 빠져들었는지 궁금하다.
전간기 경제적 혼란에 대해 각자 생각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다. 킨들버거는 영국이 물러난 세계 경제의 리더십을 미국이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이켄그린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존재하던 각국의 협조와 금본위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대한 대중의 신뢰가 사라졌음에도 금본위제라는 도그마에 매달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테민은 1차 세계대전 이전과 달라진 노동환경과 정치적 지형, 생산 과잉이 맞물려 일어난 현상으로 본다.
모두 동의하는 것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전전(戰前)과 달리 전간기(前間期)는 정치-사회적 지형이 달라졌다. 국가가 개입하는 영역과 비중이 많이 늘어났고, 노조 같은 압력단체의 영향력에 흔들리기 쉬워졌다. 실업 해소와 국내 산업의 보호가 정치적 과제로 자리 잡았다.
- 국제 경제 현안을 조율을 어렵게 하는 첨예한 각국의 이해관계와 적대감이 존재했다. 전쟁 채무문제와 전쟁 배상금 문제가 대표적이다.
- 전쟁 기간 카르텔로 성장한 조선, 철강, 석탄 같은 분야의 과잉생산이 문제가 되었고, 농업 분야의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이 심각했다.
- 전쟁 기간 과도하게 풀려난 화폐에 의한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었다. 1920년대 초, 독일과 중부 유럽국가의 초인플레이션과 여러 나라의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은 극도로 커졌다.
전전(戰前)의 금본위제는 자유로운 자본과 인력, 상품의 이동을 위해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각국의 중앙은행은 어떤 나라의 금 태환이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밀접하게 협조해야 한다. 금본위제의 게임의 법칙에 따르면 경제가 악화하여 디플레이션에 빠진 나라는 금본위제의 ‘게임의 법칙’에 따라 시장이 자율적으로 교정되도록 간섭하지 않거나, 오히려 금리를 올려 외국의 자본(금)을 유입을 촉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단기간 실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전전의 경우 실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비했고 노조 같은 노동자 계급의 압력단체의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정책 결정은 보수적인 엘리트들의 밀실 합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국가의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국가재정도 GDP 대비 10% 미만에서 균형재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경우 안정적인 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각국이 협력할 여지가 있다.
전간기에는 전사자, 상이군인, 제대군인에 대한 막대한 연금이 지급되어야 했고, 실업에 극렬히 저항하는 노조가 당연히 일어나야 할 산업구조 개편을 방해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정치는 이익단체와 압력단체의 영향력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는 비례대표제에 따라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균형재정을 유지하거나 국제적 금융협력을 위해 국내 실업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전쟁이 일으킨 국민 간의 적대감 또한 높았다.
미국은 베르사유 종전협정에 참여하지 않고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전쟁 기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에 빌려준 전쟁채무는 사소한 것까지 받길 원했다. 영국은 미국이 전쟁채무를 탕감해 주지 않는다면 독일의 전쟁 배상금을 받아서 미국의 전쟁채무를 갚겠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배상금은 꼭 받아야 하며, 미국이 전쟁채무를 받기 원한다면 독일이 미국에 가지고 있는 자산을 전쟁채무와 대신하자는 입장이었다. 독일은 전쟁 배상금을 갚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1924년 초인플레이션은 이런 독일의 입장을 강화하는 듯 보였다.이런 상황에서 금융-경제 협력이 가능할 리 없다.
전쟁 이후 과도하게 풀려나간 화폐, 각국의 재정적자에 의한 화폐 불안, 전후 복구를 위해 필요한 재정 조달, 이런 모든 문제를 가장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방법은 있었다. 주요국 통화의 금평가를 동시에 낮추고 각국의 통화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협력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전쟁 채무를 탕감하거나 크게 줄여 주고,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포기했어야 한다. 이렇게 했다면 1920년대 초의 파괴적인 인플레이션과 192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유 무역이 위축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파괴적인 경제공황이 유발한 정치적 격변과 군국주의, 파시즘의 등장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위 전문가들 모두 전간기 경제공황의 이유로 시장실패를 지목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실패, 혹은 정부 간 국제적 협력의 실패를 지목한다. 시장의 탐욕에 의해 벌어진 경제 위기라는 대중의 인식은 리먼사태 이후 더욱 보편화 된 미신이다.
대공황의 원인을 한마디로 따지자면 1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이 전쟁이 국제적 공조의 틀을 크게 파괴했고, 건전하지 않은 통화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산업구조를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중공업 위주로 왜곡하였고 수요와 공급에 맞게 조정을 받아야할 산업의 구조조정을 관세와 무역쿼터 같은 무역장벽으로 보호했다. 그럼에도 꼭 써야 할 환율 자유화, 혹은 현실화 조치는 끝내 외면하였다.
책을 보다 보면 버냉키라는 낯익은 이름이 각주로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전 연준의장 버냉키가 맞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버냉키는 전간기 경제공황 전문가이다. 버냉키를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은 각국 정부는 전간기 경제 공황기에 이미 비현실적이 된 금본위제를 사수하느라 화폐 공급이 줄여서 피해를 장기화한 점에 동의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전전 금 평가에 맞춰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게 비현실화 되었다면 각국은 협력하에 동시에 각국의 화폐를 평가 절하한 다음 금본위제에 복귀했어야 한다. 아니면 차라리 시장 자율에 맞긴 변동환율제를 택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상황은 있었지만 결국 시장에서 화폐는 부족해지고, 화폐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버냉키는 전간기 공황과 일본의 사례를 연구해 자산가격 하락과 디플레이션 초기에 막대한 돈을 푸는 정책을 사용했다. 현재 저금리와 막대한 유동성은 모두 이전 디플레이션에 대한 기억의 반작용이다. 그래서 현명하게 자산가격 하락과 디플레이션 위협에 대응한 것인가?
화폐 가치의 불안과 국제적 협력부족, 경제블록화와 보호무역조치, 등 경제 불안 요인은 전간기의 재방송을 보는듯 하다. 각지에 일어나는 지정학적 충돌의 위협까지 닮아있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만약 반복된다면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인플레이션으로 순서만 바뀐채 역사의 변주곡을 연주할 것이다. 한번은 화폐 공급의 부족에서, 한번은 화폐 공급의 과잉이 촉발할 것이다. 하지만 주연은 바뀌지 않는다. 화폐를 독점하고 시장에 개입하려는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그 주인공이다.
댓글
댓글 쓰기